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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세 낮추려는 정부…학계 "기업지배구조 감시도 함께 봐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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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상생의 금융, 기회의 사다리 확대'를 주제로 열린 네 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에서 참석자들과 토론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상생의 금융, 기회의 사다리 확대'를 주제로 열린 네 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에서 참석자들과 토론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상속세 개편 논의가 현 체계가 갖춰진 2000년 이후 24년 만에 가속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7일 상속세를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의 원인으로 지적한 데 이어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21일 “상속세 때문에 우리 기업 지배구조가 왜곡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하면서다. 과도한 상속세로 기업의 지배구조가 왜곡되고, 주가 하락으로까지 연결된다는 논리다.

한국의 명목 상속세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최대주주 할증 시 60%)이다. 그러다 보니 창업주가 기업을 아랫세대에 승계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상속세가 발생한다. 그 재원 마련을 위해 주식을 매각하면서 창업주 후손인 총수 등 최대주주 지분율이 하락하고, 그 결과 기업 지배력도 약해지는 문제를 재계는 지적해왔다.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총괄회장이 지난해 3월 21일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총괄회장이 지난해 3월 21일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상속세 때문에 경영권 위협

예를 들어 삼성의 경우 최근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삼성가(家) 세 모녀는 총 2조7000억여원의 주식을 시간 외 매매(블록딜)로 처분했다. 고(故) 이건희 선대 회장 별세로 발생한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번 주식 처분으로 홍 전 관장, 이 사장, 이 이사장의 삼성전자 지분은 각각 1.45%, 0.78%, 0.70%로 기존보다 줄었다. 이우현 OCI홀딩스 회장도 부친 별세 뒤 상속세 마련을 위해 OCI홀딩스 지분율 1% 정도를 매도하면서 최대주주에서 3대 주주로 내려앉았다.

재계는 ‘상속세 리스크’가 기업 매각이나 경영권 위협으로 이어지는 점을 핵심적인 문제로 보고 있다. 실제로 국내 사무용 가구 1위 한샘, 종자업체 1위 농우바이오, 콘돔 1위 유니더스 등이 사모펀드에 매각된 데에는 상속세 부담이 크게 작용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재계는 상속세 개편을 요구해왔다.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인협회 등에 따르면 요구의 핵심은 ▶최고세율 인하 ▶최대주주 할증(20%) 폐지 ▶유산세를 유산취득세로 변경이다. 이중 유산취득세 변경은 정부가 2022년 연구용역을 발주해 마쳤을 정도로 논의가 진전됐다. 유산 총액을 기준으로 과세하는 유산세 방식과 달리, 유산취득세는 상속받는 사람을 기준으로 개별 과세해 상속세 총액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9년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도 유산취득세 도입을 권고했을 정도로 야권의 공감대도 있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상속 문제와 맞물린 지배구조 문제

그러나 상속세율을 낮추는 등 개편을 하려면 기업지배구조 감시 논의도 함께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더 큰 원인은 한국의 대기업 총수 일가가 소수 지분으로 전체 계열사를 지배하고, 총수 이익을 위해 다수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하는 후진적 지배구조에 있다는 주장이다. 사실 지난 17일 윤 대통령의 ‘코리아 디스카운트’ 발언의 단초가 된 유튜버 슈카월드(전석재)의 질문도 한국 기업지배구조 문제에서 출발했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이유는 가장 큰 게 북한 등 지정학적 요인이고, 그다음이 기업지배구조”라며 “총수 중심인 이사회가 주주의 이익이 아닌 총수를 위해서 행동하고, 경영진이 총수의 상속세를 낮추기 위해 움직이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자본시장연구원도 지난해 5월 ‘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 분석’ 보고서에서 취약한 기업 지배구조를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국 상장기업에서는 지배주주가 사적 이익을 추구할 유인은 높은 반면 무능한 지배주주를 교체하는 것은 어려운 구조”라고 평가했다. 반면 “지배주주를 견제할 수 있는 소액주주 권리 보호 수단, 이사회 기능, 기관투자자 기반은 취약하다”고 했다.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에 따르면 2020년 기업지배구조 평가에서 한국은 아시아 12개국 중 9위로 하위권이었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에서 전광판에 코스피지수가 표시돼 있다. 이날 코스피 종가는 전장보다 61.69p(2.47%) 내린 2,435.90으로, 코스닥지수는 전장보다 21.78포인트(2.55%) 내린 833.05로 거래를 마쳤다. 연합뉴스

지난 17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에서 전광판에 코스피지수가 표시돼 있다. 이날 코스피 종가는 전장보다 61.69p(2.47%) 내린 2,435.90으로, 코스닥지수는 전장보다 21.78포인트(2.55%) 내린 833.05로 거래를 마쳤다. 연합뉴스

“상속세-지배구조 개혁 빅딜하자”

이 때문에 대기업 총수 특혜 논란에 갇힌 상속세 개편 논의가 기업지배구조 개선 방안과 함께 추진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한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상속세 인하와 거버넌스(지배구조) 개혁안의 빅딜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기업 오너들이 승계를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할 수 있게 하는 대신 주주를 위한 기업이 될 수 있도록 견제 장치도 마련하자는 것이다.

이 교수는 상법상 이사의 법적 책임 조항을 ‘이사진은 모든 주주를 위해 일해야 한다’로 변경하는 안을 주장했다. 현재 상법엔 ‘이사진은 회사를 위해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돼 있는데, 이사진이 오너 대주주를 위해 움직이는 근거로 이 조항이 작용한다는 지적이 그간 있었다. 이런 방향의 상법 개정에 대해선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지난해 법무부 장관 시절 ‘공감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교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는 상속세 개선과 거버넌스 개혁을 맞바꾸는 대타협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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