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또 간병 살인 비극…"안방에 아버지 있다" 숨진 아들의 유서엔

중앙일보

입력

[중앙포토]

[중앙포토]

“안방에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묻어주세요.”

지난 17일 대구 달서구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발견된 50대 남성 A씨 유서 내용이다. 이날 오전 8시18분 “화단에 사람이 숨진 채 발견됐다”는 신고가 접수됐고, 경찰이 A씨의 옷 주머니를 살펴보니 유서로 추정되는 쪽지와 집 주소를 알 수 있는 신분증이 있었다. 유서에는 집 비밀번호도 적혀 있었다. 경찰이 가보니 A씨의 80대 아버지가 안방에 숨져 있었다.

19일 대구경찰청에 따르면 A씨는 15년 전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를 홀로 돌봐왔다. 그런 아버지가 치매 판정을 받은 건 8년 전이었다. 대학 강의를 해왔던 A씨는 이후 일을 그만두고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다. 형제들이 준 돈과 아파트 담보대출로 생활비를 마련했다.

국가 지원받지 못하고 홀로 돌봐  

A씨는 국가나 지자체에서 별도로 지원을 받지 못했다. 건강보험공단은 당사자나 가족·대리인이 노인장기요양보험 등급을 신청하면 건강 상태 등을 조사해 등급을 부여한다. 가장 낮은 등급인 ‘인지 지원’ 등급을 받더라도 주·야간 보호센터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A씨는 기초생활수급 가정이 아니었다. 요금 체납 등도 위기가구 반응도 없어 지자체 복지망에 포착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관할 달서구가 복지 서비스도 제공하지 않았다. 달서구 관계자는 “현재까지 우리 지역 치매안심센터에 등록되신 분은 아닌 거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이 아니면 행정 기관이 먼저 나서서 도움이 필요한 돌봄 환자를 파악하기 힘든 복지 사각지대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40년간 돌본 아들, 뇌졸중 아버지도….

[중앙포토]

[중앙포토]

A씨처럼 가족이 오랜 병간호생활에 지쳐 가족을 살해하는 ‘간병살인’ 비극은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대구에서는 불과 3개월 전에 60대 아버지 B씨가 40년간 돌본 장애아들을 살해했다. B씨는 지난해 10월 남구 자택에서 1급 뇌병변 장애가 있는 아들(39)에게 흉기를 휘두른 뒤 자해를 시도해 의식불명 상태가 됐다가 회복했다. 조사 결과 B씨는 아들을 돌보기 위해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함께 생활하며 간병을 도맡아온 것으로 파악됐다.

2021년 대구에서 20대가 아버지를 홀로 돌보다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도 있다. 당시 22살이던 청년은 2020년 9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2021년 4월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자 퇴원시켰고 음식과 물을 주지 않아 숨지게 했다. 청년은 재판에서 “2시간마다 아버지 자세를 변경해야 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며 “혼자서는 병간호를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았고,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시민단체 “현행 체계로 간병살인 해결 못 해”

지난해 6월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조사 결과. [중앙포토]

지난해 6월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조사 결과. [중앙포토]

 지난해 6월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조사 결과. [중앙포토]

지난해 6월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조사 결과. [중앙포토]

시민단체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대구지부와 함께하는 장애인부모회는 “제대로 된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으면 중증장애인과 그 가족은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쉬운 것일지도 모른다”며 “중증장애인 지원체계·자립지원·돌봄부담 대책 마련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복지시민연합도 “현행 사회복지체계에서는 돌봄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다”며 “이런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정부와 국회가 적극 입법화에 나서야 한다. 국민건강보험 병간호급여 도입, 중증 장애인에게 필요한 만큼의 활동지원서비스 제공 등 보편적이면서도 특성에 맞는 맞춤형 공공책임돌봄시스템 로드맵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