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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억] 눈 오는 날의 기다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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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4호 31면

집 보는 아이, 전북 부안, 1977년 ⓒ김녕만

집 보는 아이, 전북 부안, 1977년 ⓒ김녕만

점점 눈발이 거세지는데 기척이 없다. 아무리 목을 빼고 기다려도 쉽사리 오시지 않는 엄마 대신 소리 없이 눈만 내리고 있다. 이 사진을 보면 시인 기형도의 ‘엄마 걱정’이란 시가 떠오른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찬밥처럼 빈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라고 했던 시인은 그 시절을 ‘유년의 윗목’이라고 회상했다.

집안에서도 털모자를 쓰고 완전무장을 해야 할 만큼 온기가 없는 집에서 오로지 엄마가 빨리 돌아오시기만 기다리는 ‘집 보는 아이’는 성에가 허옇게 얼어붙은 창밖으로 고요히 눈 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이대로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게 될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에 홀로 집에서 엄마를 기다려본 사람은 기억할 것이다. 눈 크게 뜨고 애타게 기다리면 안 오시다가 제풀에 지쳐 스르르 잠들면 어느새 저녁 밥상 차려 나를 깨우던 엄마. 어둑한 방에서 눈 비비며 어리둥절하다가 내 눈앞에 있는 엄마를 확인하면 괜히 눈물이 났다.

얼마 전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한 젊은이가 통화하는 내용을 들었다. 약속 장소로 가는 중인 모양인데 “여기는 어디 역이고 몇 정거장 남았고…”라고 중계방송하듯이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왜 아직 못 오는지, 어디쯤 오고 있는지, 하등 궁금해할 필요가 없는 요즘 세대에게 기다림이란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다. 눈부신 현대문명이 궁금증을 즉석에서 해결해주는 바람에 ‘기다림’은 실종되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길다. 그러나 끝내 올 것이라고 믿고 기다릴 때, 기다림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를 오롯이 생각해보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그럴 때 기다림은 설렘의 시간이 되고 만남의 기쁨과 비례한다. 이제는 간절히 기다릴 사람조차 없는 나이에 이르고서야 어릴 적 엄마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그 시간이 행복이었음을 깨닫는다.

김녕만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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