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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부터 김옥균까지…백탑에 서린 개혁의 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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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4호 23면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하얀 돌탑’ 원각사지 십층석탑

서울 종로 탑골공원 에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일제 강점기 당시 모습. 인근에 사는 선각자들이 모여 ‘백탑파’를 형성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종로 탑골공원 에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일제 강점기 당시 모습. 인근에 사는 선각자들이 모여 ‘백탑파’를 형성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백탑(白塔)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 한복판에 우뚝 솟아 흰 자태를 뽐냈다. 백탑이 있어 지금의 종로 탑골공원은 그 이름을 얻었다. 1897년 대한제국 최초 근대 공원으로 동양의 불탑이란 의미의 파고다공원으로 명명된다.

파고다는 곧 탑파(塔婆)의 영역인데, 할미 탑이다. 마고할미의 기도가 있는 고려 때는 흥복사가 있었고, 조선에서는 세조가 건립한 원각사가 있던 자리였다. 원각사지 십층 석탑은 하얀 돌탑이다. 하늘에 대한 기도처럼, 탑을 도는 탑돌이는 돌고 도는 회향(回向)이다. 회향은 해현경장(解絃更張)이다. 인생은 늘 거문고 줄을 풀어 다시 매는 그런 해현경장의 새로운 다짐과 같다.

백탑을 돈다. 돌고 도는 회향의 역사. 우리 모두 오랜 세월 백마 타고 온다는 북극성의 나그네를 기다리며, 눈 내리는 백탑을 돈다. 회향을 하면 백탑파들이 돌아온다. 백탑이 꿈꾸는 개화의 꽃을 들고.

박규수가 일곱 살 무렵 외가에 놀러 갔을 때다. 그는 땅바닥에 불탑을 그리며 놀았다. 그런 모습을 본 외종조이자 고명한 성리학자인 류화는 시 한 수를 지어 준다. “네가 석탑을 그릴 때 한 층 한 층 높아지듯 성인군자가 되는 일도 평범한 데서 시작하니 네게 가르치는 독서법은 이것이다”는 내용이다. 박규수가 그린 석탑을 따라 할아버지인 연암 박지원이 돌아온다.

시로써 조선의 개혁 논하던 백탑파

박지원은 탑골에 살았다. 그가 사는 탑골로 사람들이 모였다. 연암은 절세기문(絶世奇文)이었다. 단편소설 『호질(虎叱)』로 통렬하게 양반사회를 풍자한 호방한 천재였다. 그가 살던 원각사지 10층 석탑 인근에 사람들이 모이며 ‘백탑파’가 형성된다. 백탑파는 백탑시사(白塔詩社)를 열며, 조선의 개혁을 위해 『호질』 같은 풍류회를 연다. 시로써 천하를 논하고 통음과 풍류로 천하의 올바른 길을 열고자 했다. 박지원을 비롯해 당대 책벌레 이덕무, 대문호이자 대문장가 박제가, 유득공 그리고 홍대용과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무사이자 협객 백동수가 있었다.

담헌 홍대용과 박지원의 풍류는 지금도 세간에 전한다. 하얀 눈이 내린 밤 홍대용이 박지원을 찾아온다. 박지원은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이라는 양금(洋琴)을 꺼내 홍대용의 거문고와 어울려 하얀 밤을 지새우며 고아(古雅)한 풍류를 즐겼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일본으로 망명한 직후인 1885년 촬영된 사진. [중앙포토]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일본으로 망명한 직후인 1885년 촬영된 사진. [중앙포토]

망원경으로 천체를 본 천재 홍대용이 죽자 연암 박지원은 집에 있는 악기를 모두 치우고 절음(絶音)한다. 지음(知音)을 잃은 통한이다. 홍대용은 음악의 미(美)는 맛(味)과 같다고 『담헌집』에서 말한다. 백탑파는 음악 또한 고리타분한 성리학의 예악론을 벗어나 산조(散調)와 같은 맛과 멋이 있는 개화 음악을 열었다. 그렇듯 백탑파는 당시 관념에만 치우치던 주자 학설을 거부하고 자주적 학문의 자세를 견지하며 사람을 보듬는 이용후생의 학문을 펼쳤다. 그리고 백탑파의 꿈은 후손과 제자를 통해 개화사상을 열었다.

백의(白衣). 백탑을 돌면 ‘백의정승’ 유대치가 온다. 개화의 선각(先覺)으로 박규수와 오경석, 그리고 유대치를 꼽는다. 이들은 추사 김정희와 그의 스승 박지원의 문우 박제가를 관통한다.

개화사상의 싹은 박규수의 북촌 사랑방에서 움텄다. 박규수가 두 번째로 중국에 갈 때 오경석이 역관으로 동행한다. 역관 오경석은 서양의 신식 무기에 맥없이 무너지는 청나라의 모습을 통해 조선의 운명 또한 시간문제라 판단했다. 이에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해국도지(海國圖志)』 『박물신편(博物新編)』 등 다수의 서적을 이웃에 사는 친구 유대치와 나누어 보며 개화의 꿈을 키웠다.

1876년 박규수가 타계하고, 오경석마저 1879년 병사한다. 유대치는 그들과 함께 북촌의 양반 자제들을 개화의 동력으로 키웠다. 유대치는 불교를 깊이 믿어 높고 청백한 품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학문으로는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고금의 역사에 통달했고, 변설은 유창했고, 신체는 장대하고, 홍안백발에 항상 생기 있는 인물이었다고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은 말한다.

탑골 위 북촌에는 주로 노론이, 탑골 아래 남촌에는 소론, 남인, 북인 등이 모여 살았다. 그리고 중인이나 양반 자제들도 남촌에 모여 살았다고 매천야록에 써 있다. 백탑을 중심으로 반상의 신분 경계 없이 남촌과 북촌의 인재들이 새로 백탑파의 개화의 꿈으로 모였다. 백탑파는 개화의 선각 유대치와 박규수, 오경석 그리고 북촌 5걸로 다시 핀다.

무역으로 개화 자금 마련한 유대치

전남 장성군 북이면 송산리에서 발견된 유대치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비명. ‘백의유대치월헌홍규지묘(白衣劉大致月軒洪奎之墓)’라고 적혀 있다. [사진 유영심]

전남 장성군 북이면 송산리에서 발견된 유대치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비명. ‘백의유대치월헌홍규지묘(白衣劉大致月軒洪奎之墓)’라고 적혀 있다. [사진 유영심]

최남선은 『고사통(古事通)』 ‘개화당의 연원’에서 “박영효,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과 귀족이 아닌 이로 백춘배, 정병하 등은 다 대치 문하의 준모(俊髦)다. 일본을 이용해 청을 몰아내고 청년 중심의 신국(新國)을 건설하는 것이 이상(理想)의 윤곽이니 박영효, 김옥균 등이 일본교섭의 선두에 나선 것도 실상 대치의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개화당으로 지목하는 이는 대개 대치의 문인들이었다”고 적었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 “유대치 거사는 선(禪)을 이야기하기 좋아했다.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이 그를 따르고 도를 물으니 일시에 선풍이 서울을 휩쓸었다… 동쪽 일본을 시찰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당시의 세계정세를 보게 됐고 그리하여 혁신을 결의하게 됐다. 그런데 그 본말을 따져보면 실로 유거사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고 썼다.

개화 세상을 여는 문은 변법자강의 길이다. 유대치는 불리(佛理)를 세상에 응용하여 개화사상을 꽃피웠다. 백탑의 꿈이었다. 유대치는 개화파 봉원사 승려 이동인을 통해 일본과 직접 무역을 하며 막대한 이윤을 남겨 개화 자금을 마련했다. 개화파에는 중·궁녀·내시·군인·상인들과 나아가 천민들도 적지 않았다. 개화파는 비밀 결사형식의 조직인 〈충의계〉를 조직한다. 고균은 그들 젊은 혁명가들과 갑신년 개화의 봉화를 올린다.

갑신정변이 내건 기치는 ‘반청(反淸) 자주’와 ‘부패 민씨 정권 타도’였다. 1884년 12월 4일 저녁 9시 우정국 개국 파티에서 시작된 정변은 6일 오후 7시 30분 북묘 앞에서 끝났다.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분으로, 고종 부부를 경우궁으로 데려갔다가 다시 창덕궁으로 들어온 일행은 5일 밤 무기고를 열었다.  소총을 일일이 꺼내 살펴보니 총과 칼이란 죄다 녹슬어서 처음부터 탄환을 장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때 청나라 병사 1500명이 궁궐로 진입해 사격을 개시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가 일본군 철수를 선언하고 일본군이 퇴각했다. 부패 정권이 쌓아놓은 부패의 덫, 그만큼 민씨 척족 정권의 부패는 깊고 넓었다. 갑신정변은 실패했다. 김옥균은 결국 1894년 음력 2월 22일(양력 3월 28일) 고종의 자객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 상하이에서 죽었다. 김옥균의 시신은 3월 9일 서울로 돌아와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됐다.

유대치 또한 갑신정변 후 행방을 감춘다. 전남 장성 송산마을에 있는 한 묘 옆에는 ‘백의 유대치 월헌 홍규(白衣 劉大致 月軒 洪奎)’라는 비석이 서 있다. 마을 원로들은 “우리 할아버지 어릴 때도 있었던 ‘삼일천하 할아버지’의 묘”라고 기억했다.

유길준은 개화를 인간사회가 ‘지선극미(至善極美)’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역사가 미(未)개화, 반(半)개화, 개화의 단계를 거쳐 변법 진보한다는 문명진보사관을 제시한다. 그 개화의 방법으로 개혁을 주장하였지만 그는 점진적이고 자발적인 변화와 개혁을 추구해야 함을 역설했다.

1894년 갑오년 봄 동학이 일어선다. 백의(白衣)의 동학군은 일어서면 백산(白山)이요 앉으면 죽산(竹山)이었다. 그해 7월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조선은 다시 개화의 줄로 고쳐 맨다. 그러나 갑신년 개화파들이 청나라 군대에 난사 당하고 죽산의 동학은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몰살당한다.

백탑의 꿈은 늘 회향한다. 개화의 꿈은 경장이다. 해현경장하듯 세상을 경장한다.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4·19 혁명으로 백탑에 들불이 인다. 개혁과 혁명의 변법자강을 위한 경장같이, 우리는 매일 구두끈을 고쳐 매는 아침을 맞는다. 파고다 탑골공원에 개화의 봄이 피었는지 두고 볼 일이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김태균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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