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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지속가능한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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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

한·일 과거사 해법이 난기류 속으로 들어가는 인상이다. 정부가 3자 변제를 거부하는 징용 피해자에게 변제금을 받아 가게 하기 위해 법원에 공탁을 시도하자, 법원은 피해자의 부동의를 이유로 불수리 결정을 내렸다. 수리되었다면 해당 피해자가 일본기업의 압류자산을 현금화할 길이 막혔을 것이다. 3자 변제 해법의 빈틈이 드러났다. 이 와중에 대법원은 일본기업의 배상을 명하는 판결을 계속 내놓고 있다. 추가 판결이 이어질 것이다. 이들에 대한 변제를 위해 추가 재원이 필요한데, 현재 이를 마련할 방안은 불투명하다. 한편 군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법원은 일본 정부의 주권 면제를 부인하는 판결을 내놓았다. 이처럼 정부의 정책에 어긋나는 움직임들이 계속되고, 이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상당하다.

애당초 대법원의 징용 판결은 국민적 지지를 받은 터라, 우리 기업의 돈으로 대신 변제하자는 정부의 해법은 정치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대법원 판결을 변경하는 3자 변제 방안이 정부의 행정행위에 불과했으므로, 법적으로도 취약했다.

초당적 정치 통해 여론 모았어야
야당과 징용문제 해법 소통하고
일본의 추가 호응도 이끌어내길
미국 통해 일본 설득하는 방법도

만일 당시에 정부가 보수 진보의 지도급 인사들을 모아 협의하고 해법을 도출하는 정치적 과정을 거쳤다면 여론의 호응도가 달랐을 것이다. 사실 대법원의 판결처럼 여론의 큰 지지를 받는 사안을 변경하려면 상응하는 정도의 범사회적·초당적 정치과정을 통해 여론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했다. 마침 진보 진영에서도 문희상 전 국회의장 등이 3자 변제와 유사한 해법을 제기하던 터였다. 이러한 정치과정을 통해 3자 변제를 법제화하는 데까지 나갈 수 있었다면(문희상 의장은 유사한 법안을 발의했다), 법적 취약점도 보완이 되었을 것이다.

만일 일본 쪽에서 처음부터 유연한 호응이 있었다면 국내여론을 무마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도 없었다. 일본은 징용문제가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서 시작된 것이므로 한국 내에서 해결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징용문제는 1965년 한·일 합의로 끝났다는 입장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일은 할 수 없다는 자세다. 일본 기업이 돈을 내더라도 피고 기업은 낼 수 없고, 그 돈도 3자 변제나 징용 관련 사업에 써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법적 정합성이 있을지 모르나, 정치적으로는 지나치게 경직된 접근이라고 생각된다.

한국과 일본 내 사정이 이러한 가운데, 한국은 한·일 안보협력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으로 선회하여 미국이 주도하는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안보협력 체제에 동참하였다. 이후 한·일, 한·미·일 안보협력이 추진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북·중·러의 반작용이 심하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한·일 안보협력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부추기기 좋은 환경이다.

이대로 가면, 여론의 지지라는 정치적 기초가 약한 상태에서 건물을 짓고 이를 계속 증축하는 식이 될 수 있다. 여론이 과거사 해법과 안보협력을 따라가지 못할 수 있다. 그러다 정부가 바뀌면 그간의 진전이 무력화될 수 있다. 한·일관계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런 식의 전진과 후퇴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정부가 이제라도 야당 및 진보 여론과 소통하여 여론의 지지기반 확대를 모색하면 좋겠다. 정부는 그동안 지극히 정치적인 사안을 혼자서 행정적으로 다뤄왔다. 이런 접근방식을 지양하고, 정치적 소통과정을 거쳐 과거사 문제와 한·일 안보협력을 다루기 바란다. 내용적으로도 지금의 과거사 해법에 일본의 추가적인 호응을 확보하는 보완책을 강구하고, 한·일 안보협력을 온건하게 추진하기 바란다. 캠프 데이비드는 우리 외교의 획기적인 전기였지만, 일반 국민은 이에 생소하며, 이를 소화하는 데 시간과 설명이 필요하다. 일본의 호응에 대해 부연하자면, 일본도 한국 내에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하면 한·일관계 개선에 역행하는 기류가 조성될 수 있으므로 종래의 접근에 정치적 접근을 가미하여 징용문제에 유연성을 보이기 바란다. 지금은 일본이 나서서 한국 정부를 도울 때이다.

물론 일본 사회의 보수화 분위기와 기시다 정부의 낮은 지지도를 고려할 때, 일본 정부가 유연성을 발휘하기 어려운 여건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국이 생각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미국의 역할을 청하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일본에 대해 정치적 유연성을 권유해 왔지만, 차제에 강도를 높여 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한·일의 민간이 나서서 여론을 환기하는 것이다. 마침 한국 내에는 이 방향으로 움직여온 모임들이 있다. 한·일 정부가 민간의 움직임을 성원하고, 양국의 민간 모임이 힘을 합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요컨대 지금의 한국 내 관련 동향은 우려의 대상이며, 각방의 정치적 유연성이 필요하다. 모두가 내키지 않더라도 유연한 행보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만 과거사와 한·일 안보협력 간의 미묘한 함수관계를 풀고, 지속가능한 한·일관계 개선을 기할 수 있다.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