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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불나면 끝이야"…가스통에 떡솜 그대로, 구룡마을의 겨울 [르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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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 13일 오전 9시 50분쯤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전기 합선으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해 방바닥과 벽 등이 불에 탄 모습. 사진 독자제공

지난 13일 오전 9시 50분쯤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전기 합선으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해 방바닥과 벽 등이 불에 탄 모습. 사진 독자제공

“어차피 불나면 다 끝이야. 거기 불붙으면 형님네도 다 타는 거야.”

서울 마지막 판자촌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36년째 사는 주민 김모(72)씨는 15일 “1년 전 악몽이 떠오른다”며 옆에 앉은 이웃에게 이같이 말했다. 이틀 전인 지난 13일 4구역의 한 판잣집에서 불이 난 것을 두고서다. 지난해 이맘때에도 화재가 발생했던 같은 구역이다.

소방에 따르면 13일 오전 9시 50분쯤 발생한 불은 소방차 8대가 출동해 곧바로 진화해 다행히 번지진 않았다. 이 집에 살던 60대 여성이 불을 끄려다 손에 경미한 화상을 입었다. 소방서 측은 화재 원인을 판잣집 천장의 전기 합선으로 추정했다.

지난해 1월 20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4구역 주택에서 큰 화재가 발생, 소방당국이 진화작업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월 20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4구역 주택에서 큰 화재가 발생, 소방당국이 진화작업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예고된 재난’인 구룡마을 화재가 올겨울에도 어김없이 발생한 것이다.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26차례 불이 났다. 이강일 구룡마을자치회장도 “하도 화재가 많이 나니까 이제 겨울만 되면 불난다고 생각할 정도”라고 말했다.

실제 구룡마을에는 지난해 1월 20일 4구역에서 난 불이 5구역으로 확산하면서 주민 500명이 대피했고, 60여채가 불에 탔다. 주민 수십명은 생활터전을 잃었다. 2014년 화재 땐 70대 남성이 사망했다. 나무 합판과 플라스틱 섬유로 덧대 지은 무허가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보니 한 번 불이 나면 삽시간에 번져 피해가 커진다.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 LPG 가스통과 소화기 등이 집 밖에 방치돼 있다. 이보람 기자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 LPG 가스통과 소화기 등이 집 밖에 방치돼 있다. 이보람 기자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토공포로 둘러쌓인 집 벽에 소화기가 비치돼 있다. 이보람 기자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토공포로 둘러쌓인 집 벽에 소화기가 비치돼 있다. 이보람 기자

무허가 판잣집이다 보니 수십번 화재가 반복돼도 근본적 시설 대책 없이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다. 특히 작년 1월 화재 피해를 키운 주범인 일명 ‘떡솜’이 여전히 올겨울에도 쓰이고 있었다. 떡솜은 공사현장에 쓰는 회색 부직포를 여러 겹 덧대거나 그사이에 노란 솜뭉치를 넣어 만든 보온 단열재다. 주민들은 떡솜으로 판잣집 가벽을 덧대거나 지붕을 덮어 칼바람을 막는 데 이용하는 등 구룡마을에선 보편화된 재료다. 문제는 석유화학제품을 원료로 만든 합성섬유여서 불에 잘 탄다는 점이다. 떡솜 외에도 솜이불이나 담요, 버려진 플래카드 등을 둘러놓은 집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3구역 거주자인 이모(67)씨는 “10년 전부터 개발한다고 난리들인데 누가 집에 투자하겠나. 난연성 단열재 설치는 꿈도 못 꾼다”고 말했다. 신수한(84)씨도 “불에 덜 타는 단열재가 있다고는 들어봤지만, 이 동네에서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가연성 물질이 곳곳에 방치돼 있었다. 사람 1~2명이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엔 액화석유가스(LPG)통이 세워져 있고, 그 옆으론 가스선이 그대로 외부에 노출돼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전봇대에서 이어진 전선들은 어지럽게 뒤엉켜 판잣집 지붕 위를 지났다. 마을 곳곳의 빈집들에는 연탄 수백장이 쌓여 있었다. 지난해 말부터 서울도시주택공사(SH)의 도시개발사업이 본격화하면서 이주 가구가 늘어 떡솜이나 가스통을 그대로 방치한 빈집들도 늘었다.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입구에 화재 주의를 당부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보람 기자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입구에 화재 주의를 당부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보람 기자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전봇대에서 나온 전선이 지붕 위로 뒤엉켜 있다. 이보람 기자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전봇대에서 나온 전선이 지붕 위로 뒤엉켜 있다. 이보람 기자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연탄창고로 쓰이는 한 빈집에 화재주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보람 기자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연탄창고로 쓰이는 한 빈집에 화재주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보람 기자

대신 불조심을 강조하는 안내문만 곳곳에 붙어 있었다. 마을 입구부터 “연탄 및 전열기 사용을 주의하여 화재로부터 소중한 인명과 재산을 보호합시다”라는 문구의 커다란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연탄 보관 창고로 쓰이는 폐가에도 “구룡마을은 화재에 매우 취약하게 건축된 건축물로 화재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며 주의를 당부하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강남구청은 최근 수년간 가구마다 소화기를 지급하고 마을 곳곳에 소화전 등 소방시설도 추가 설치했다. 65세 이하 마을 주민들을 중심으로 의용소방대도 꾸렸다고 한다. 올해는 매일 화재 점검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백동현 가천대 소방공학과 명예교수는 “소방시설 확충 등 단기적 예방책도 필요하겠지만 구룡마을은 한 번 불이 나면 번질 수밖에 없는 취약한 환경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개선 없이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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