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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채병건의 시선

가짜뉴스에 취약한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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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Chief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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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에서 더욱 면밀하게 주시할 건 해외발 뉴스다. 온라인 공간에는 국경이 없으니 출처를 알 수 없는 가짜뉴스에 발끈해 한국인들끼리 싸우는 사태가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설사 사후에 출처를 알아내도 해당 국가에 항의했다간 물증도 없이 흥분한다며 면박을 당하기 십상이다. 거꾸로 온라인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쪽 입장에선 자신을 숨긴 채 타깃을 겨냥해 심리전·여론전을 구사할 수 있으니 신세계나 다름없다.

외국발 가짜뉴스는 전쟁, 대선과 같은 중대 국면에서 자주 등장한다. 2020년 미국 대선이 끝나고 넉 달이 지난 2021년 3월 미국 정보당국이 이례적으로 가짜뉴스 보고서를 펴낸 게 그 예다. 당시 이 보고서는 대선 국면에서 러시아가 미국을 분열시키기 위해 여론 개입을 시도했다고 지목했다. 한국 역시 해외발 가짜뉴스의 안전지대가 아니다. 사실 한국은 가짜뉴스에 상당히 취약한 지형 위에 서 있다.

러·중·북 사이버 여론전 대가
가짜뉴스, 국론 분열에 기생
시간 걸려도 여론 통합 나서야

첫째로 해외발 가짜뉴스가 통하려면 가짜뉴스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물리적, 사회적 시스템이 마련돼 있어야 한다. 정보와 여론을 통제하는 권위주의 국가에선 가짜뉴스의 유통 속도와 범위가 제한된다. 반면 열린 사회는 함부로 가짜뉴스라는 딱지를 붙이는 걸 금기시한다. 한국에서 가짜뉴스를 막겠다는 이유로 중국식 검열을 도입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즉 가짜뉴스는 대체로 열린 사회의 틈을 노린다. 한국은 또 일찌감치 마련해놓은 인터넷망으로 나라 전체가 ‘유비쿼터스 시대’를 살고 있다. 가짜 뉴스 역시 각종 정보·뉴스와 동일하게 일거에 퍼질 물리적 여건이 마련돼 있다.

둘째로 열린 사회라고 해서 해외발 가짜뉴스가 마구 돌아다니는 건 아니다. 한국이 국제사회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나라라면 주요국이 자원을 투입해 한국에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얻을 게 없어서다. 하지만 현재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최전선에 있다. 미·중 대결이 격화하면서 안보는 물론 공급망에서도 G2 대치의 경계선이 됐다. 미국도 중국도 ‘당신은 누구 편인가’를 묻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뒤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를 공급하면서는 한·러 관계의 민감도 역시 상승했다.

셋째로 한국과 접한 이들 주변국이 사이버 여론전의 대가라는 데 한국의 지정학적 특징이 또 있다. 가짜뉴스를 대외 전략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가 러시아와 중국이다. 공산주의가 모태인 두 나라는 선전선동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페이스북, X(옛 트위터)에 만든 가짜 계정이 무더기로 삭제됐다는 외신 보도가 끊이지 않는 게 한 예다. 한국은 이들 외에 또 다른 강적이 있으니 북한이다. 북한은 줄곧 남한 흔들기 전략에 올인해 왔는데 이젠 온라인 공간이 남남갈등 전술을 펼칠 새로운 영역이 됐다.

넷째로 가짜 뉴스의 파괴력은 나라 내부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국론이 분열돼 있어야 가짜뉴스가 잘 먹힌다. 모든 심리전의 핵심은 사실과 허위를 교묘하게 섞어 놓는 데 있다.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 역시 어딘가엔 단편적인 팩트를 섞어 놓는다. 이런 교묘한 혼합술이 국론 분열과 엮이면 가짜뉴스가 오래 간다.

가짜뉴스는 의회민주주의의 대표자 격이었던 미국까지 쪼개고 있다. 미국의 지난 대선 한 달 후인 2020년 12월 미 공영라디오방송(NPR)이 한 여론조사를 보도했는데 결과가 황당했다. ‘아동을 성착취하고 있는 사탄 숭배자들이 미국 정치와 미디어를 조종하고 있다’는 데 17%나 동의했다. ‘잘 모르겠다’ 응답도 37%나 나왔다. 해당 여론조사 담당자는 NPR에 “미국민의 절반이 (사탄 숭배자들의 아동 성착취가) 사실이거나 사실일 수도 있다고 답한 꼴”이라며 “끔찍하다”고 토로했다. 아동 성착취는 미 민주당 고위 인사들이 아동 성착취를 하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음모론을 뜻한다.

한국 역시 진영 대립이 첨예하다. 가짜뉴스는 이를 파고든다. 사실 가짜뉴스는 온라인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과거에도 ‘이간책’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중국의 왕조 교체 국면에선 내통설을 퍼트려 최전방을 영웅적으로 지키던 장수에 누명을 씌우는 이간책이 종종 등장한다.

가짜뉴스는 쪼개진 나라에서 효과를 발휘하고, 가짜뉴스가 효과를 발휘할수록 나라가 분열된다. 가짜뉴스가 곰팡이라면 가짜뉴스가 계속되게 만드는 습기는 국론 분열이다. 그래서 해외발 가짜뉴스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상식을 가진 이들이 다수가 되고, 반대로 가짜뉴스를 믿고 싶은 이들을 소수로 만드는 사회적 합의 구조를 구축해 놓아야 한다. 가짜뉴스를 상대하려면 시간이 걸려도 정공법을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