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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금호미술관, 중견작가 7인 회화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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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우리는 햇빛을 연출했다.”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르(79)가 1996년 완공한 발스 온천(Therme Vals)을 가리키며 한 말입니다. 온천을 설계하며  ‘목욕’이라는 의식(儀式)을 염두에 둔 그는 “어둠과 빛, 물에 반사되는 빛, 증기로 가득한 대기 중으로 분산되는 빛 연출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습니다. ‘건축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 44명의 말과 글을 모은 책 『건축가』(까치)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서울 삼청동 금호미술관에서 ‘마주한 세계: 풍경의 안팎’ 전시는 이 ‘빛’이라는 화두를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합니다. 도성욱, 송은영, 신선주, 유현미, 윤정선, 이만나, 정보영 등 작가 7인의 회화와 사진 등 83점을 선보이는 큰 전시인데요, 각자 일상에서 경험한 빛의 풍경을 흥미롭게 보여줍니다.

정보영, Flowing and Pause, 2022, 캔버스에 유채, 227x162㎝. [사진 금호미술관]

정보영, Flowing and Pause, 2022, 캔버스에 유채, 227x162㎝. [사진 금호미술관]

그중에서도 정보영(50)은 빛과 공간의 관계를 탐구해온 작가입니다. 그는 “빛이 좋은 날 작업실에 종일 머물며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관찰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데요, 창문과 커튼 자락과 유리 공, 혹은 촛불을 소재로 빛이 공간과 사물에 일으키는 잔잔한 파장을 캔버스에 담아냅니다.

상상의 빛을 표현하기 위해 숲의 장면을 집요하게 그려온 작가도 있습니다. 도성욱(52)입니다. 그에게 숲은 빛을 그리기 위한 재료인 셈인데요, 온기를 품은 부드러운 빛으로 익숙한 풍경을 새롭게 경험하게 이끕니다. 이밖에 강렬한 흑백 대비 건축 풍경에 시간과 역사를 녹여낸 신선주(51), 익숙한 일상에서 한순간 낯설게 다가온 대상과 풍경을 포착한 이만나(52), 파스텔 톤으로 공간의 기억을 재구성한 윤정선(52)도 있습니다.

‘빛’이라는 화두를 넘어서 실내 공간을 소재로 환영과 실재의 혼재를 탐구한 송은영(53), 사진, 회화, 조각, 설치, 영상을 넘나들며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비현실적인 공간을 선보이는 유현미(59) 작품도 흥미진진합니다.

이 전시가 유독 반가운 것은 서울 시내 한가운데서 오랜만에 만나는 중견 작가들의 회화 전시라는 이유도 있습니다. 미술관에 난해한 개념미술 전시가 많아진 이 시대에 붓과 캔버스 작업만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묵묵히 실험해온  작가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얼마 전 세계적인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86)를 단독으로 인터뷰하며 “그림이야말로 ‘천직’이라는 생각에 변함없냐”고 물었는데요, 그의 대답이 아주 명쾌했습니다. “앞으로도 회화의 자리는 변치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회화의 종말을 얘기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회화를 통해 아름다움과 색채,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는 것을 사랑하고, 회화는 그것을 포착하는 최고의 방법의 하나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