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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향은의 트렌드터치

탐욕의 사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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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

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

사막의 땅 라스베이거스는 매해 1월이면 가능성이 넘실대는 기회의 땅이 된다. 전 세계를 통틀어 연례행사 중 가장 크고 유명한 박람회 중 하나인 CES(Consumer Electronics Show)가 열리기 때문이다. ‘모두를 위한, 모든 기술의 활성화(All Together, All On)’란 주제로 1월 9일부터 4일간 개최된 CES 2024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재개된 지난해에 이어 역대 최고급 규모로 진행되었고, 통 큰 주제답게 각지에서 모여든 모든 분야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K-컬쳐의 인기만큼이나 뜨거운 K-가전과 K-기술에 대한 지대한 관심 덕에 한국은 올해만 약 600여 개 업체가 참여해 명실공히 스타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했다.

일상 속 AI 경연장 된 CES
AI는 기술 이전에 철학 문제
차별화된 가치로 혁신해야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1967년 시카고에서 처음 시작한 CES가 1978년 라스베이거스로 개최지를 이전한 후 성장을 거듭해 오늘날의 위상을 차지하기까지 CES는 혁신제품들을 세상에 소개해주는 신박한 무대의 장(場)으로 기능했다. 가정용 VCR(비디오테이프 리코더)이 CES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SONY의 CD플레이어 역시 그렇게 데뷔했다. VCR은 가정에서도 누구나 동영상을 녹화하고 녹화한 영상을 자유롭게 시청할 수 있는 홈 엔터테인먼트 경험을 선사했고, CD플레이어는 아날로그 음악재생 방식을 디지털 형태로 전환하는 혁신을 보여주었다. 이외에도 세계최초 DVD, 블루레이 디스크, HDTV와 같은 혁신제품들이 줄줄이 CES를 통해 존재를 알렸다.

혁신 가전의 메카였던 CES에 2014년 스마트홈과 차량용 기술이 다뤄지면서 IoT가 부상하기 시작했고, 2018년에는 5세대 이동통신 기술인 5G 기술과 함께 증강현실이 주목받았다. 기술의 트렌드가 변곡점을 맞아 다양한 궤도를 보이는가 싶을 즈음 창궐한 코로나 탓에 2020년과 21년은 온라인 행사로 대체되었고, 2023년에 비로소 오프라인 행사의 본 모습을 되찾았다.

올해의 주제인 ‘모두를 위한, 모든 기술의 활성화’는 기술의 포용성을 어필하는 동시에 누가 인공지능을 일상 속으로 가장 잘 들여왔는가, 그 진짜 실력을 겨루어 보라는 도전을 부추겼다. CES 사상 처음으로 화장품 기업인 로레알 그룹 CEO가 기조연설에 나선 것 역시 무관하지 않다. 기조연설자 5명 중 4명이 전자·전기가 아닌 유통, 화장품, 조선업체 등 타 산업군의 CEO가 나섰다. 푸드 테크나 뷰티 테크는 고객과 일상의 최접점으로 ‘비가역적(非可逆的) 경험’의 혁신을 노리며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한번 시작하면 사용하지 않았을 때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런 경험 말이다.

참가 기업 수도 방문자 수도 역대 최고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최대 가전제품 전시회에 가전제품 수는 현저히 줄었다. 최대 화두인 AI를 품은 제품들은 쇼의 전통적인 영역을 넘어 자동차와 로봇 그리고 비즈니스 생태계의 모습으로 대거 출현하여 최대한 자연스러운 고객 경험 혁신을 시도하고 있었다. 과거처럼 가슴을 뛰게 하는 혁신적인 출품작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는 푸념도 들린다. 그도 그럴 것이 ‘가전제품’이란 단어 역시 재정의 되어야 할 정도로 세상은 변했다. ‘백색가전’이란 말이 없어진 것처럼 말이다. ‘집(家)에서 쓰는 전자기기’인 가전이 놓일 집은 스마트홈으로 변모하고 있고, 스마트홈은 그 자체로 비물질적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가장 개인적인 공간이지만 연결의 혜택을 누리며 살게 되는 순간 완벽히 독자적인 공간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1년 개봉작 영화 ‘AI’를 다시 보았다. 감정을 갖게 된 로봇 소년의 기구한 여정에 동요되었던 무거운 마음이 ‘모두를 위한 AI’를 주창하는 CES를 보고 나자 조바심으로 바뀌었다. AI가 현실의 복잡한 맥락에 조화롭게 녹아들어 인간의 발전을 도우며 일상의 혁명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기술이 아닌 차별화된 고객가치로 혁신의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비행 길에 고른 영화는 2013년작 ‘그녀’(Her)였는데, 두 편의 간극인 12년이라는 세월엔 엄청난 반전이 숨어있었다. 놀랍게도 ‘사람을 사랑하는 AI 소년’에서 ‘AI 비서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어 있었다. AI 인간이 사랑하게 할 것인가, AI 인간을 사랑할 것인가. AI는 기술이기 이전에 철학의 문제다.

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