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폭 넓히는 ‘골든걸스’
지난 5일 가수 이효리의 음악방송 ‘더 시즌즈-이효리의 레드카펫(KBS2)’이 시작됐다. 블랙핑크 제니가 이효리를 축하하러 KBS에 처음 출연해 화제가 됐고, 이효리는 제니와 나란히 댄스 챌린지까지 하며 원조 아이돌의 위엄을 과시했다. 직전 방송된 ‘골든걸스’에선 가수 이은미가 양 어깨와 한쪽 다리를 드러낸 드레스를 입고 프라이머리의 ‘씨스루’를 열창했다. ‘무대 위 잔다르크’라는 오랜 이미지를 벗고 ‘로맨틱 섹시’ 컨셉트에 도전한 것이다.
일본 진출 마이니치신문 1면 장식도
요즘 중장년 여가수들의 활약이 심상찮다. 대표주자가 ‘골든걸스’다. 프로듀서 박진영이 인순이·박미경·신효범·이은미까지 전설의 디바들을 모아 ‘5세대 걸그룹’으로 데뷔시켰다. 평균연령 59.5세의 ‘선생님’들을 요즘 스타일의 신인 걸그룹으로 튜닝하는 서사인데, 장년 여성의 신체적 한계를 시험하는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 지난 연말 데뷔곡 ‘원 라스트 타임’을 발표하고 종횡무진했다. 잊혀져 가던 원로급 가수들이 팬 사인회와 게릴라 콘서트를 열고, 연예대상 신인상 수상에 스트레이키즈·뉴진스 등 아이돌과 함께 일본까지 진출해 마이니치신문 1면을 장식했다. 이런 폭주 끝에 12일엔 잠자는 연애세포까지 깨우는 스윙 재즈풍의 후속곡 ‘더 모먼트’를 공개하며 또 다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30~40년간 자기 스타일을 고수해 온 명가수들의 이런 모습을 아무도 상상한 적 없었다. 이들이 걸그룹 시스템에 적응하려 합숙을 하며 댄스와 보컬 레슨을 받는 광경이 ‘도전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는 동기부여형 휴머니즘적 서사로 소비되는 이유다. 하지만 ‘골든걸스’가 중요한 건 그런 개인적 용기의 문제를 넘어 대중음악 시장의 변화를 암시하고 있어서다. 나이 든 여가수들이 복고풍 무대에서 옛날 노래를 부르며 ‘레전드’로 소환되는 것이 아니라, 트렌드를 이끄는 현역가수로서 유의미한 상품성을 검증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의 발화점은 이효리다. 지난해 김완선·엄정화·보아·화사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댄스가수들로 ‘댄스가수유랑단’을 꾸려 관광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았다. 초등학생 태권도 대회장까지 찾아가 히트곡들을 부르는 모습에 ‘언제까지 추억팔이 예능을 할건가’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자신들을 잊었거나 아예 몰랐던 세대에게 존재감을 환기시키는 고도의 마케팅 행위였다. 중장년 여가수의 음악을 아무도 제작하려 하지 않는 가요시장에서 스스로 바닥까지 내려가 멍석을 깐 것이다.
실제 이효리는 6년 만에 ‘후디에 반바지’라는 신곡을 내고 광고시장까지 복귀해 승승장구다. 엄정화와 김완선의 연말 단독 콘서트도 꽤 화제였고, 김완선은 박진영의 신곡 활동을 함께 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별다른 변신 없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이든 여가수의 확장성을 개척했다고 보기는 애매한 단계다.
‘골든걸스’는 이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최고의 프로듀서 박진영이 57~66세 ‘원로’들을 자본주의 K팝 시스템에 올려놓고 뉴트로 트렌드의 상품으로 만드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여가수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을 서서히 뒤집는 ‘가스라이팅’에 성공한 것이다.
‘걸그룹’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표하며 ‘할매그룹’을 자처하던 이들이 골반을 튕기는 안무가 포인트인 씨스타의 ‘터치 마이 바디’나 바닥에 누워 각선미를 강조하는 미쓰에이의 ‘굿바이 마이 베이비’를 욕심껏 소화하게 되는 게임에 어느 새 시청자도 빠져들어 버렸다. 일상에선 소탈한 할머니같은 인순이가 진한 메이크업에 핫팬츠를 입고 엉덩이를 흔들 때 손가락질이 아니라 ‘걸크러시’라며 응원하게 된다. 여성이 예쁘고 날씬하지 않으면 중심에 설 수 없었던 방송을 옆집 언니같은 비주얼로 점령해버린 ‘스트릿우먼파이터’처럼, 나이 든 여성에게 우아함을 강요하는 미의 기준을 뒤흔든 것이다.
박진영이 프로듀서로 참여 판 키워
진짜 주인공이자 최후의 승자는 박진영이다.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중장년 여가수 시장을 개척하는 모험을 자기 회사도 아닌 공영방송 플랫폼에서 하고 있다. 몸소 신곡을 제작할 뿐 아니라 유튜브 라이브 방송 등으로 팬을 모으고 ‘골져스’라는 근사한 팬덤명까지 붙여줬다.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싹쓰리’부터 ‘환불원정대’ ‘댄스가수유랑단’까지 이효리와 김태호PD가 만들었던 음악예능과 ‘골든걸스’의 차별점은 박진영이라는 프로듀서가 붙어 판을 키운 점”이라면서 “‘미스터트롯’이 주부노래교실이나 밤무대에 숨어 있던 트로트 생태계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음반·콘서트 시장을 만든 것처럼, 또 다른 세대의 비어 있는 소비자층을 포착한 영리한 기획”이라고 평가했다.
박진영은 “방송을 먼저 제안했기 때문에 정말 놀라운 일을 하고 싶었다. 윗세대 아티스트들을 소개함으로써 가요시장이 조금 더 다양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관건은 방송 이후 시장의 변화가 이어지느냐다. 2월 3일 골든걸스 전국투어가 시작되는데, 이들을 응원하고 지지할 중장년 소비자들의 욕구는 댄스 챌린지의 놀라움이 아니라 고유의 묵직한 발성과 폭발하는 성량, 가슴을 적시는 선율과 노랫말일지 모른다. 이영미 평론가는 “노래 자체의 감동보다 도전과 고생의 과정을 보여주는 리얼리티의 재미가 컸기에 지속가능성은 의문”이라면서 “골든걸스에 그치지 않고 후속 기획이 나와서 그 세대 다른 가수들도 같이 올라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고 수용자들의 흐름을 이뤄야 새로운 생태계가 정착될 것”이라고 말했다.
‘음악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돌연변이를 이해하면 사회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다’는 자크 아탈리의 말처럼, 골든걸스가 요즘 사회의 가장 큰 화두인 다양성과 포용성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내포한다는 시선도 있다. 조지선 연세대 심리학과 객원교수는 “기성세대가 새 문법을 따르려는 노력을 함으로써 세대통합에 기여하고, 나이든 여가수는 점잖은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넘어섰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30대 중반만 되면 더 이상 신곡을 듣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도 있듯, 나이가 들수록 가수도 청자도 다양한 시도를 하지 않게 되지만, 지금은 다양성 향상이 중요해진 시대다. 골든걸스의 다양성 향상을 축하해 주고 그들의 새로운 스타일도 수용한다면, 음악적 취향 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생각이 넓어지고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좋은 성과도 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