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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 사색] 거미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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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3호 30면

거미줄
정호승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거미줄에 걸린 아침 이슬이
햇살에 맑게 빛날 때다
송이송이 소나기가 매달려 있을 때다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진실은 알지만 기다리고 있을 때다
진실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진실은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고
조용히 조용히 말하고 있을 때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창비 1999)

종종 사람에게 속는 날이 있습니다. 마음은 늘 앞서는 것이었고 설고 어리숙한 면모가 늘 내 안에 가득한 탓입니다.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던 일에 깜빡 속은 적이 있었고 속는 줄 알면서 속아 넘어갈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거짓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후회하고 원망하면서도 우리는 곧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나는 다릅니다. 내가 나를 속여서는 안 됩니다. 내가 나에게 속아서도 안 됩니다. 이 거짓에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고해줄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온갖 삶의 증명을 만들어내면 낼수록 점점 진실과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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