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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속 재난이 현실로…영화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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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3호 22면

오동진의 전지적 시네마 시점

영화에서 재난은 한때 오락이었다. 일어나지 않을 사고니까 안심하고 보고 즐기라는 식이었다. 그래서 마천루 빌딩에 불을 지르고(‘타워링’, 1974) 애먼 댐을 지진으로 무너뜨리거나(‘대지진’, 1974) 심지어 별다른 이유없이 지진과 화산 폭발, 거대한 해일을 동시다발로 일으켜 지구를 멸망시키려 했다.(‘2012’, 2013)

이제 영화 속 재난은 공포의 이슈가 됐다. 영화는 마치 구약의 노아가 예견한 것처럼 재난의 이미지를 보여 주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고 방주를 만들어야 할 때라고 외친다. 재난은 더 이상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며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이미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투모로우’ 나왔을 때 지식인들 코웃음

퍼펙트 스톰

퍼펙트 스톰

2004년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이 영화 ‘투모로우’를 만들었을 때 과학자들, 지식인 관객들은 코웃음을 쳤다. 이야기를 쥐어 짜도 너무 쥐어짰다는 식이었다. 지나친 기후 온난화로 양 극지방의 빙하가 녹고 해수면의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결국 지구 전체가 빙하로 뒤덮이게 된다는 설정이다. 몇 가지 지점에서 과학적으로는 말이 안되는데 특히 기온이 떨어지는 속도를 너무 영화적으로 포장하려 했기 때문이다. 비행 중인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얼어서 부러지는가 하면 해변에 밀려드는 파도가 한 순간에 얼음이 되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그럴 리가 없겠으나 어쨌든 엄청난 추위가 들이닥칠 수 있다는 기이한 현실감을 부여한 것만은 사실이고, 인간이 추위 때문에 모두 죽을 수 있다는 ‘느낌적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사실 이 영화는 추위가 주제가 아니라 부성의 상실, 부권의 회복을 테마로 한 것이다. 워싱턴에 있던 기후학자이자 아버지인 잭 홀(데니스 퀘이드) 박사는 모두들 남으로 남으로, 예컨대 플로리다 같은 곳으로 피난을 떠날 때 ‘나 홀로’ 북쪽인 뉴욕으로 향한다. 거기에 아들 샘 홀(제이크 질렌할)이 있기 때문이다. 잭은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의 아내이자 의사인 루시(셀라 워드)도 그걸 잘 안다. 그러나 루시는 이런저런 얼음 장비를 갖추고 길을 떠나는 남편을 잡지 않는다. 꼭 살아 돌아 오라며, 우리의 아들을 꼭 데려 오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 장면은 이상하게도 무정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그건 우리 모두, 부모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잭 홀 박사는 대학의 도서관에서 니체나 쇼펜하우어 같은 책을 태우라는 교수의 지시에 따라 불을 피우며 간신히 살아 있는 아들을 구해낸다. ‘투모로우’는 우리에게 추위 이상의 두려움, 곧 미래세대를 잃을 수 있다는 통한의 자각을 담고 있다. 그게 감동을 줬고 인기를 모으게 한 요인이었다.

한편으로는 꽤나 정치적인 메시지도 담고 있는데, 당시 미국은 9·11 사태 직후였고 대통령은 부시2세였으며 사람들은 부시가 잭 홀 같은 아버지가 아님을, 자신들을 추위에서 구해낼 수 없는 지도자라는 것을 생각하던 때였다. 현재 덴마크와 스웨덴 일대의 기온이 영하 43.6도이다. 모스크바는 영하 30도이다. 기후의 역습은 괜한 말이 아니다. 이러다가 우리는 모두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영화라는 이름의 노아가 진작 경고해 왔던 사실이다.

물의 공포는 사실 기독교 등 종교가 종종 차용해 온 무기 아닌 무기이다. 신이 노할 때 자주 ‘쓰시는’ 것이 물이다. 그렇다면 요 몇 년 간은 분명히 신께서 화가 나신 게 분명하다. 세계 곳곳이 물 난리를 겪고 있다. 스웨덴이 극한 추위에 시달리고 있는 요즘 서유럽, 특히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프랑스 북부에는 어마어마한 물폭탄이 쏟아졌다.

BBC 6부작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는 세계정세에 대해 탁월한 식견을 보여 준 작품이다. 2034년 근미래가 배경인데 영국에는 트럼프 같은 포퓰리스트 정치인 비비안(엠마 톰슨)이 나와 나라를 극도의 진영 논리로 밀어 넣는다. 아이들은 트랜스젠더를 넘어 트랜스휴먼의 세계를 원하는데, 손바닥에 모바일 폰을 심거나 두뇌에 칩을 이식시키는 것이 점차 현실화 된다. 바닷가에는 난민 아이들의 시체가 밀려 오고, 시리아에서 시작된 난민 문제는 영국 내 노동자들의 극단적 이기주의, 정치적 극우주의를 파생시킨다. 환경 오염 문제는 뒷전이고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서로 바리케이드를 친다. 코로나 직전인 2019년에 나온 이 드라마는 섬뜩할 정도의 예언서이자 신(新)요한계시록 같은 작품이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런던에 어느 해는 50일간 비가 내리고 그 다음 해에 다시 80일간 비가 내린다는 것이다. 주인공 가족들은 늘 비를 맞는다. 비에 갇혀 산다. 비가 그렇게 오는 게 과연 현실적인가 싶지만, 한국 여름도 요즘 심상치가 않다. 초기에는 게릴라성 호우라는 이름이었으나 점점 더 집중호우라는 표현이 많아지다가 아예 물폭탄이 쏟아질 것이라는 기상예보도 등장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순식간에 비가 내려 급격하게 불어난 물로 인명피해가 잇따랐던 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물이 세상을 잠기게 한다. 영화는 진작부터 이를 예언해 왔다.

스웨덴 극한 추위, 영국·프랑스 물폭탄

스즈메의 문단속

스즈메의 문단속

한편 지진은 일본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아마도 그건 2011년 3월에 발생했던 동일본대지진과 쓰나미 사태가 너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 6일 일본 서북부 지역인 니가타 현 107㎞ 해역에서 지진이 발생했고, 꽤 인명피해가 났다. 일본은 특히 자연재해가 심각한 나라인데 지진과 태풍이 끊이지를 않는다. 사람들이 일상을 어떻게 유지하고 살아가는지 오히려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은 좌파냐 우파냐 식의 이데올로기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당장 내일이라도 자신 스스로와 주변의 친지가 어떻게 죽을 지 모르다는 생활 속 위기감을 갖고 살아 간다. 일본인들이 죽음에 대해 비교적 차분한 표정과 태도를 보이는 것은 죽는다는 것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천재 감독 신카이 마코토가 만든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걸 잘 보여 준다. 주인공 스즈메는 일종의 역술가인 토지시(閉じ師, 닫는 자) 소타와 함께 일본 전역을 다니며 영험한 묘석으로 문단속을 하려고 한다. 이 둘이 다니는 동선이 의미심장한데 스즈메가 현재 살고 있는 규슈의 구마모토에서 출발해 시코쿠의 에히메로 갔다가 혼슈의 고베로, 그리고 마지막은 스즈메가 어릴 때 살았던 후쿠시마까지 간다. 모두가 대지진의 엄청난 재난이 발생했던 곳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스즈메의 선한 행동을 통해 더 이상의 죽음이 없기를 소망한다. 일본에서든 어디에서든 이제 대규모 재난은 피할 수 없지만, 사람들의 희생이 가슴 아프지 않게 우리 모두 ‘문단속’을 잘하자고 얘기한다.

씨네 파일

씨네 파일

스즈메가 소타와 뛰어 다니는 모습은 기이할 정도로 큰 감동을 준다. 사람이 재난 속에서 살아 남든, 그렇지 못하든, 가장 인간적일 때는 뭔가를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때라는 것을 영화는 강조한다. 2022년 말에 개봉된 이 애니메이션은 국내에서 560만명에 이르는 관객을 모았다. 현재 그 감독판인 ‘스즈메의 문단속 : 다녀왔어’가 개봉 준비 중이다.

태풍을 다룬 영화도 어마무시하게 많다. 그중 걸작은 독일계 감독 볼프강 페터슨이 2000년에 만든 ‘퍼펙트 스톰’이다. 조지 클루니와 다이안 레인, 마크 월버그가 나온다. 경제적으로 막다른 위기에 몰린 어부들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폭풍 그레이스를 뚫고 고기잡이에 나서는 이야기이다. 선장 빌리 타인(조지 클루니)은 오랜 여사친이자 여자 선장인 린다(메리 엘리자베스 마스트란토니오)의 걱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폭풍 속으로 자신의 배를 돌진시킨다. 허먼 멜빌의 위대한 걸작 『모비딕』의 태풍 재난판 영화고, 영화 속 선장 빌리는 소설 속 선장 에이허브이다. 소설의 화자 이스마엘은 영화에서는 바비(마크 월버그)이다. 소설과 달리 바비는 죽는다. ‘퍼펙트 스톰’의 모든 어부들은 태풍에 희생된다. 그러나 그 마지막을 임하는 인물들의 태도가 이 영화의 화룡점정이다. 선장 빌리를 포함해 모두들 대자연의 위력 앞에 겸허한 태도를 취한다. 자연이 자신들을 취하려 할 때 그 순간을 담담하게 맞이한다. ‘퍼펙트 스톰’은 재난영화가 단순히 재앙을 경고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재난을 통해 인간은 오히려 위대해질 수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래야 한다.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11@naver.com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 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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