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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시 퇴출한 군기반장 까르푸…고래 싸움에 웃는 진짜 승자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4일 프랑스 파리의 한 까르푸 매장 진열대에 '펩시코 제품을 팔지 않는다'는 문구가 붙어있다. 연합뉴스

지난 4일 프랑스 파리의 한 까르푸 매장 진열대에 '펩시코 제품을 팔지 않는다'는 문구가 붙어있다. 연합뉴스

전 세계적으로 고물가 기조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의 한 거대 유통업계가 ‘군기반장’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프랑스계 대형 슈퍼마켓 체인인 까르푸는 지난 4일(현지시간)부터 “용납할 수 없는 가격 인상”을 이유로 매장 진열대에서 미국 펩시코 제품을 제외했다. 정부가 아닌 유통업계가 제조업체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나선 드문 사례인데, 당장 실효적인 효과를 거두진 못할지라도 유통업계와 제조업체 간 샅바 싸움이 소비자에겐 이득일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까르푸, 펩시·레이즈·치토스 등 판매 중단

11일 외신을 종합하면 까르푸의 이번 결정은 프랑스뿐 아니라 이탈리아·스페인· 벨기에에도 적용된다. 해당 매장에선 펩시·레이즈(감자칩)·도리토스·치토스·퀘이커오트 등 펩시코 제품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미국 투자은행 번스타인에 따르면 펩시코의 전 세계 매출 중 판매 중단된 까르푸 매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0.25%로 추정된다.

이번 조치에 대한 해석은 전문가마다 분분하다. 실뱅 샤를부아 캐나다 달하우지대 식품학 교수는 언론 기고문에서 “판매 중지 조치는 공급망에 대한 통제권을 쥐기 위한 의도”라고 분석했다. 액면 그대로 ‘소비자를 위한 행동’으로 보긴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까르푸의 경우 개인 상표가 붙은 제품(PB제품)을 이용해 펩시코와의 격차를 쉽게 메울 수 있다”라며 “장기적으로 볼 때 소비자의 선택권을 줄이고 식품 공급망 전반에 걸쳐 경쟁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대형마트 까르푸는 9월부터 동일한 가격에 상품 용량이 변경됐을 때 이를 제품 앞에 별도로 표시하기로 했다. 감자칩 매대에 ‘#SHRINKFLATION’이란 표시가 붙어 있다. 사진 까르푸 링크드인

프랑스 대형마트 까르푸는 9월부터 동일한 가격에 상품 용량이 변경됐을 때 이를 제품 앞에 별도로 표시하기로 했다. 감자칩 매대에 ‘#SHRINKFLATION’이란 표시가 붙어 있다. 사진 까르푸 링크드인

과거 사례를 반추하며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2022년 캐나다에서도 레이즈 감자칩의 가격 인상 여부를 두고 펩시코캐나다와 유통업체 로블로 간 갈등이 격화돼 거래가 잠시 끊겼다가 두 달 만에 밀실 합의에 성공, 유통이 재개된 적이 있다. 웨이버튼 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의 포트폴리오 매니저 티네케 프리키는 “(판매중단이) 의미가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유통업체는 미국 최대 식료품점인 월마트가 관련된 경우일 때”라고 말했다. 독점 유통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결국 몇 주 혹은 몇 달 후 공급업체의 인상안을 받아들이고 제품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원재료 값이 상승하는 상황에서 제조업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가격을 올리거나 용량을 줄이거나 두 가지 방법뿐”이라며 제조업체들의 사정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고물가 상황서 유통업계 역할 필요하다” 주장 나와

다만 일부 국내 전문가들은 까르푸의 의도가 뭐였든 가격 상승을 이어가는 제조업체에 경고 시그널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시도라고 평가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소비자들의 부담을 늘리는 업체 상품은 취급하지 않겠다는 유통업체가 늘어난다면 제조업체에 압박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유통업계가 표면적으로 군기반장 역할을 할 경우 제조업체가 혁신되는 측면이 있다”라며 “가격을 두고 제조-유통업계가 갈등할수록 소비자에겐 이득”이라고 말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내 유통업계가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뒷짐을 지고 있는 부분을 지적했다. 강 교수는 “한국은 소비자 단합력이 약하다 보니 유통업계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 지난달 한국여성소비자연합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마트와 롯데마트, 홈플러스 자체브랜드(PB) 가공식품 742개 중 44.1%가 지난해보다 값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가격은 그대로지만 양을 줄인 슈링크플레이션 사례도 9건으로 조사됐다.

소비자 불만이 이어지자 정부는 슈링크플레이션 방지 제도화에 나섰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가격조사전담팀을 신설해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한편 용량 변경 정보를 의무적으로 표시하도록 하는 법적 제도 마련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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