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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주정완의 시선

어설픈 탁상행정이 부른 교통대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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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주정완 논설위원

주정완 논설위원

오세훈 서울시장이 퇴근길 시민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지난 6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인 ‘오세훈TV’에 올린 2분 40초짜리 영상에서다. 이날 저녁 서울 명동 입구 광역버스 정류장을 찾은 오 시장은 우산도 없이 눈을 맞아가며 사과 영상을 찍었다. 그는 “평소에 10분이면 (버스가) 빠지던 게 1시간씩 걸리고, 5분 기다렸다 (버스를) 타시던 분들이 30분씩 기다리는 일이 생겼다”며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현장을 무시한 서울시의 탁상행정이 부른 퇴근길 교통대란이었다. 원래 명동 버스 정류장은 퇴근 시간마다 근처 직장인이 한꺼번에 몰리기로 유명한 곳이다. 경기도 신도시 등에 살면서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 도심권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많이 이용하는 정류장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혼잡한 이곳에 서울시가 버스 번호별 ‘줄서기 표지판’을 설치하면서 상황을 악화시켰다.

‘생활인구’ 무시한 서울시 결정에
퇴근길 시민들 극심한 불편 호소
행정 편의주의 발상부터 버려야

그 전에는 버스가 먼저 도착하는 순서대로 승객을 태우고 바로 떠났기 때문에 교통 체증이 아주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표지판 설치 이후 수많은 버스가 정류장 앞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서는 ‘열차 현상’이 발생했다. 서울시가 안전을 명목으로 설치한 버스 표지판이 퇴근길 직장인에겐 극심한 불편으로 돌아왔다. 오 시장은 “좀 더 신중하게 일을 해야 했다”며 “추운 겨울에 새로운 시도를 해 많은 분께 대기 시간이 길어지는 불편을 드렸다”고 잘못을 인정했다.

“죄송하다”는 말로만 그쳐선 안 된다. 오 시장을 포함한 서울시 교통정책 담당자들은 이번 일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일단 서울시는 이달 말까지 표지판 운영을 멈추고 보완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어떤 보완책을 낼지는 모르겠지만 행정 편의주의가 아닌 시민의 편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이번 일에선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선 관료주의적 일방통행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민 대다수가 못살던 시절에는 엘리트 공무원의 일방주의식 행정이나 정책 결정을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었다. 과거 한국 경제의 압축 성장에는 관 주도의 효율적인 자원 배분이 일정 부분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확실히 달라졌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만 달러를 넘어서는 시대가 열렸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시민의 의견을 열심히 듣고 행정과 정책에 반영하는 건 당연한 의무다. 그런데 서울시는 뒤늦게 시민의 의견을 듣겠다고 밝혔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이 터지고 난 다음이 아니라 그 전에 시민의 의견을 들었어야 했다. 간혹 공식 발표 전에 정책 결정이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게 보안을 유지해야 하는 예외가 있긴 하다. 예컨대 부동산 개발사업처럼 시장에 민감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다. 이번처럼 버스 정류장에 표지판을 설치하는 일까지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문제는 ‘생활인구’에 대한 배려다. 경기도나 인천에 집을 두고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서울시민은 아니다. 서울시장이나 구청장에 대한 투표권도 없다. 어쩌면 서울시가 교통대란을 초래할 정도로 안이하게 대처했던 데는 이런 인식이 바탕에 깔렸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을 서울시가 무시해도 된다는 건 전혀 아니다.

법률(인구감소지역 지원 특별법)에선 이런 사람을 생활인구라고 규정한다. 특정 지역의 주민등록 인구를 넘어서는 폭넓은 개념이다. 월 1회 이상 업무·통학·통근 등으로 해당 지역을 방문하거나 체류하는 인구와 외국인을 포함한다. 특히 서울에 직장을 둔 사람들은 다양한 생산과 소비 활동을 통해 서울시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도 서울시의 행정 서비스를 받을 자격이 있다.

서울시는 인구 감소 지역에 속하는 건 아니지만 정책적으로 생활인구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이미 6년 전부터 KT와 함께 생활인구 통계를 조사·분석하고 있다. 서울시 홈페이지에 공개된 자료를 보면 지난 6일 기준 생활인구는 1071만 명에 이른다. 서울시에 주민등록을 하지 않은 사람 가운데 100만 명 이상이 서울시 생활인구에 해당한다는 의미다.

오세훈 시장은 신년사에서 “사람과 자본·일자리가 몰리고 풍부한 상상력과 활력이 넘치는 매력 도시”를 시정 목표로 제시했다. 다 좋은 말이다. 이렇게 서울이란 도시의 매력을 높이려면 생활인구에 대한 배려를 빼놓을 수 없다. 서울에 머물러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이유로 서울을 찾는 사람도 함께 행복한 도시가 진정한 의미에서 매력 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