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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노루 발자국 따라 걷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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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진우석의 Wild Korea ⑩ 인제 마장터

지금 북설악 깊은 계곡을 가면 깨끗한 설경을 볼 수 있다. 돌무더기를 덮은 눈이 은가루 같다.

지금 북설악 깊은 계곡을 가면 깨끗한 설경을 볼 수 있다. 돌무더기를 덮은 눈이 은가루 같다.

1월 초, 마장터는 이미 설국이었다. 지난해 12월부터 많은 눈이 내렸다. 강원도 인제군 북설악 지역은 보통 12월보다 1월 강설량이 더 많다. 마장터는 겨우내 눈부신 설국이 이어질 것이다. 설국은 눈이 지배한다. 눈이 허락해야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마장터까지는 쉽게 갈 수 있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여러 갈래길 중에서 물굽이계곡을 따라 내려왔다. 눈과 얼음이 어우러진 투명한 계곡이 겨울의 진경을 보여줬다.

깊은 산골 속 평지 같은 길

이달 초 인적 뜸한 물굽이계곡. 얼어붙은 계곡을 걷는 일은 위험하지만 황홀하다.

이달 초 인적 뜸한 물굽이계곡. 얼어붙은 계곡을 걷는 일은 위험하지만 황홀하다.

산 좀 다닌다는 사람은 마장터를 안다. 걸어서 백두대간을 넘던 시절, 큰 장이 섰던 곳이다. 미시령과 진부령에 도로가 생기면서 마장터는 잊혔지만 산꾼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국립공원이 아니어서 출입의 제약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장터에는 마음씨 좋은 정준기(82)씨가 살았다. 그의 투막집은 산꾼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호롱불이 켜진 투막집에서 산꾼들은 우정을 나누었다. 몇 해 전 정씨는 44년간 살던 마장터를 떠나 속초에 정착했고, 마장터 일부는 설악산국립공원에 포함됐다. 요즘은 오지 백패킹과 원시림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트레킹 출발점은 ‘박달나무 쉼터’다. 차를 세우고 겨울 산행의 필수품인 스틱·아이젠·스패츠를 챙긴다. 쉼터 건물 오른쪽 길로 들어선다. 너른 공터에서 계곡을 건너면, 호젓한 오솔길이 나온다. 주변은 눈으로 덮였지만, 누가 먼저 걸었는지 산길은 러셀(눈을 헤치고 길을 내는 행위)을 해뒀다. 신년 연휴에 백패커가 다녀간 흔적이다.

오솔길은 이리저리 작은 계곡을 넘나든다. 길은 순하다 못해 착하다. 평지에 가까운 완만한 오르막이다. 강원도 깊은 산중에 이런 길이 있는 게 신기하다. 여덟 번쯤 계곡을 건넜을까. 오르막 시작 지점, 정준기씨가 마장터 오는 손님을 위해 만들었던 약수터가 나왔다. 물맛이 순하고 깊었다.

눈에 파묻힌 마장터산장

마장터 가는 길에 마주친 낙엽송 군락지.

마장터 가는 길에 마주친 낙엽송 군락지.

약수터를 지나면 ‘작은 새이령(소간령)’을 넘는다. 워낙 완만해서 지나고 나서야 고갯마루인 줄 알 수 있다. 여기서부터 핸드폰은 먹통이다. 낙엽송 쭉쭉 뻗은 풍경이 이국적이다. 해발 500m가 넘는 지점에 자리한 널따란 평지, 마장터에 도착했다. 마장터산장은 눈을 잔뜩 이고 있었다. 마치 눈이 지붕처럼 보였다. 그 옆에 투막집도 보였다. 영화 ‘여덟 개의 산’에 나오는 주인공의 별장이 떠올랐다. 산에서 살고 싶었던 주인공은 결국 별장에서 눈에 파묻혀 세상을 뜬다. 마장터산장도 눈에 파묻혀 버릴 것 같다.

고민에 빠졌다. 길은 마장터까지만 나 있다. 계획했던 새이령(대간령) 가는 길은 눈이 지웠다. 다시 박달나무 쉼터로 내려가긴 아쉽다. 일단 도시락을 먹으며 생각하기로 했다. 집에서 먹는 반찬 몇 가지만 챙겼는데도 꿀맛이다.

마장터의 마장터 산장. 쌓인 눈이 하얀 지붕을 이루었다.

마장터의 마장터 산장. 쌓인 눈이 하얀 지붕을 이루었다.

길 상태를 점검하고, 물굽이계곡을 따르기로 했다. 희미하지만 발자국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자국을 밟아도 발이 푹푹 빠진다. 러셀은 엄두도 못 내고, 상대적으로 눈이 덜 쌓인 계곡으로 내려왔다. 발자국은 계곡으로 나 있다. 수량이 풍부한 계곡물은 콸콸 흐르고 군데군데 얼어 있기도 했다. 얼어붙은 계곡을 따라 조심조심 걷는다. 퍽! 우지끈! 얼음이 깨질 때마다 머리털이 곤두선다. 계곡 중간의 얼음 지대를 걸을 때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박달나무쉼터에서 작은 새이령까지 가는 길은 완만하다. 오붓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박달나무쉼터에서 작은 새이령까지 가는 길은 완만하다. 오붓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물굽이계곡에서 흘리로 가는 길 역시 눈에 묻혔다. 예상대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물굽이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돌면서 차가 다니는 진부령로까지 내려가야 한다. 한 굽이를 지나 노루를 만났다. 서로 깜짝 놀랐다. 노루는 호들갑스럽게 산으로 도망친다. 미끄러져 엉덩방아 찧는 모습을 보고 실실 웃음이 났다.

휴대폰도 안 터지는 미지의 세계

산행 중 먹은 도시락.

산행 중 먹은 도시락.

한참 걷다 보니, 발자국이 좀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맙소사! 노루 발자국이다. 노루 역시 눈 쌓인 산비탈을 피해 계곡을 따라 이동한 것이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중간중간 보이는 산악회 리본이 반갑다. 오지의 겨울 계곡 풍경은 걱정을 까맣게 잊게 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눈과 얼음과 계곡물이 어우러진 풍경은 수묵화 같기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세계 같기도 했다. 날것의 풍경들은 순수하고 투명하고 영롱했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군부대 사격장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맞게 잘 내려왔구나. 핸드폰 신호가 잡혔다. 문명 세계로 들어왔다. 사격장 앞부터 임도를 따른다. 여기도 눈이 쌓여 걷기가 쉽지 않다. 20분쯤 내려와 종착점인 진부령로를 만났다. 도로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막상 안전하게 하산하니, 물굽이계곡의 황홀한 풍경이 자꾸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걱정은 접어두고, 느긋하게 풍경을 즐기면서 내려올걸.

☞여행정보=자동차는 박달나무 쉼터에 주차한다. 주차료 5000원. 박달나무 쉼터에서 마장터까지는 3.1㎞, 1시간 쯤 걷는 쉬운 길이다. 마장터까지 인제천리길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마장터 이후는 걷기가 만만치 않다. 산행 경력자와 동행을 추천한다. 길이 열렸다면 새이령 넘어 고성군 도원리로 내려가거나, 새이령에서 마산봉을 거쳐 흘리로 내려와도 된다. 물굽이계곡 하산길은 아름답지만 다소 위험하다. 언 계곡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전체 거리는 약 9㎞, 4~5시간 걸었다.

진우석 여행작가

진우석 여행작가

글·사진=진우석 여행작가 mtswam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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