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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 베켄바워, 별세..."獨축구 역대 최고 선수 떠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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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켄바워의 생전 모습. AP=연합뉴스

베켄바워의 생전 모습. AP=연합뉴스

독일의 '축구 황제' 프랑츠 베켄바워 바이에른 뮌헨 명예 회장이 별세했다. 향년 78세.

베켄바워 감독의 유족은 8일(현지시간) dpa통신에 "베켄바워 명예회장이 전날 평화롭게 운명했다"고 밝혔다. 다만 그의 사망 원인은 공개하지 않았다.

베켄바워는 독일에서는 '카이저(황제)'로 통하는 축구의 전설이자 유럽 축구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범접할 수 없는 실력과 절대적 카리스마로 그라운드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1945년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베켄바워는 13살 때인 1958년 바이에른 뮌헨에 입단하며 축구를 시작했다. 그는 1970년대 명수비수(리베로)로 활약하며 바이에른 뮌헨을 모두 네 차례(1969, 72~74년) 독일 분데스리가 정상에 올려놨고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 3연패(1974~76년)를 이끌었다. 국가대표팀에서는 주장으로 1974년 서독월드컵 우승에 공헌했다. 베켄바워는 매년 최고의 활약을 펼친 축구선수에게 주는 발롱도르를 두 차례나 수상했다. 이 상을 2회 이상 수상한 수비수는 베켄바워뿐이다.

현역 시절 베켄바워는 존재 자체로 축구 수비 전술에 일대 변혁을 불러온 '창조적 파괴자'였다. 그는 중앙 미드필더로도 커리어 초반과 후반에 꽤 오래 뛰었다. 그러나 가장 빛난 시기는 '리베로' 또는 '스위퍼'로 활약한 시기였다. 수비 라인 뒤로 한 발 빠져서, 최후 저지선 역할을 하는 리베로, 스위퍼는 베켄바워가 활약한 1960~70년대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베켄바워는 이 포지션에 공격적인 요소를 더하면서 당시엔 볼 수 없었던 '특별한 수비수'로 떠올랐다. 한마디로 판을 바꾼 것이다. 베켄바워는 당대 최고 수준의 미드필더였다. 공을 걷어내는 데에만 집중하던 기존 리베로들과는 달리, 공을 직접 몰고 중원으로 진출하거나 정확한 전진 패스를 날려 경기를 직접 풀어나갔다. 현대 축구에서 말하는 '빌드업'이다.

그가 공을 몰고 중원으로 올라서면 독일 미드필더진은 수적 우위를 점했다. 전방 공격수들 발 앞에 떨어지는 정확한 패스는 득점 찬스로 이어졌다. 베켄바워는 수비의 마지막이자, 공격의 시작점이었다. 율리안 나겔스만 독일 대표팀 감독은 "베켄바워의 리베로 포지션에 대한 해석이 축구를 변화시켰다. 어쩌면 1960년대 유럽에 퍼져있는 문화적 자유주의와 자유의 정신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서독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든 베켄바워(가운데). AP=연합뉴스

서독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든 베켄바워(가운데). AP=연합뉴스

베켄바워는 1977년 미국 코스모스 뉴욕에서 브라질 '축구 황제' 펠레와 함께 뛰었다. 1982년에는 고국 독일 무대에 복귀해 함부르크 SV에 분데스리가 우승컵을 안겼다. dpa는 현역 시절 베켄바워가 "우아함과 경쾌함으로 리베로의 역할을 재정의했다"고 평가했다. 뮌헨에서 중앙 수비수로 활약 중인 김민재는 지난해 여름 입단 당시 "베켄바워는 존경해온 인물이다. 영상으로 그의 플레이를 보며 롤모델로 삼았다. 닮고 싶은 레전드"라고 밝혔다.

베켄바워는 카리스마도 강했다. 전방의 미드필더, 공격수들에게 늘 거만한 표정과 몸짓으로 '지시'하는 모습은 베켄바워의 전매특허와 같았다. 베켄바워는 자신과 독일 축구에 대한 자부심이 워낙 강해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서독 대표팀의 1974년 국제축구연맹(FIFA) 서독월드컵 우승에 앞장선 뒤 남긴 말에선 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결승 상대였던 네덜란드의 에이스 요한 크라위프가 대회 최우수선수(MVP)로 뽑히는 등 더 주목받자 베켄바워는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길이 회자되는 명언을 남겼다.

독일 대표팀 감독으로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우승을 달성하며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는 진기록도 썼다. 스타 선수는 지도자로 성공할 수 없다는 속설을 깼다. 베켄바워는 뮌헨 지휘봉을 잡고 1993~94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에는 행정가로 변신해 뮌헨에서 1994년부터 2002년까지 회장직을 맡았고, 2002년부터는 명예회장을 지냈다. 뮌헨은 매 시즌 흑자를 기록하는 건실한 운영으로 이름나 있다. 2006년 월드컵을 독일에 유치하고 조직위원장도 역임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2006년 월드컵 유치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들에게 금품을 건넸다는 의혹을 받았다.

독일축구협회(DFB)의 조사에 이어 스위스 검찰의 수사까지 받는 수모를 당했다. 베켄바워는 부패 혐의로 스위스 법원에서 재판받았으나 2020년 공소시효 만료로 처벌을 면했다.

베켄바워는 한국 축구와 인연도 깊었다. 차범근 전 대표팀 감독은 베켄바워와 동시대에 분데스리가에서 뛰었다. 베켄바워가 뉴욕 코스모스를 거친 뒤 독일 무대로 복귀했던 1980∼82년, 두 전설은 그라운드에서 만났다. 베켄바워와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인연을 쌓은 뒤 우정을 이어갔다. 차 전 감독의 아들 차두리 국가대표팀 코치가 2010년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명문 셀틱으로 이적할 당시 취업비자 추천서를 베켄바워가 써줬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차범근 전 감독은 2020년 제32회 차범근 축구상 시상식에서 베켄바워의 성품을 떠올리며 "내가 어릴 때는 베켄바워의 시대였다. 내게 베푼 마음 한 조각 한 조각이 따뜻해 (베켄바워의 생일달인) 9월에 축하 샴페인과 꽃, 카드를 보낸다"고 말했다. 베켄바워는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행정가로서 모두 한국을 방문했다. 1979년에는 서독대표팀 선수로 방한해 서울과 부산에서 경기를 치렀다. 1988 서울 올림픽 때는 서독 대표팀을 이끄는 감독이었다.

베켄바워는 2006년 독일 월드컵 유치위원장과 조직위원장을 맡는 등 행정가로 나선 뒤 더 자주 한국을 방문했다. 1999년 독일 월드컵 유치단장 신분으로 현재 아산재단 이사장인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찾았고, 2002 한·일 월드컵 때는 차기 개최되는 독일 월드컵을 홍보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가장 최근이었던 2013년에는 독일 정부의 '대십자 공로훈장'을 받은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에 방문했고, 당시 유치전에서의 추억을 되살리며 정겹게 대화를 나눴다. 독일 축구전문지 키커는 "베켄바워는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며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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