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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승현의 시선

검사 정치인에 대한 순진무구한 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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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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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는 정치인으로 변신해도 괜찮은 직업인이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늘 “순진무구(純眞無垢)한 궤변”이란 비판에 직면했다. 정치검사, 권력의 사냥개, 강약약강(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 강함)의 생리를 아직도 모르느냐는. 하지만, 검사라는 직업인에 대한 순진한 기대는 이후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평범한 시민을 위해, 매일 범죄자를 상대하는 엄두도 나지 않는 헌신을 직업으로 택한 ‘청년들’ 아닌가.

2008년 만들어진 ‘검사 선서’도 여전히 뭉클하다. 전국 검찰청사에 새겨져 초임 검사에게 전수되는 선서는 이렇다. “나는 이 순간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검사의 직에 나섭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공익의 대표자’를 자처하는 다짐은 정치인으로 치환해도 손색없다.

‘공익의 대표자’ 선서하는 검사
정치인의 소명과 큰 차이 없어
변신 뒤 초심부터 검증 덮칠 것

‘검사 정치인’에 대한 기대감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한 청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2018년 스물두 살의 나이에 음주운전 차량에 숨진 고려대생 윤창호다. 음주운전 사망 사고 가해자에 대한 법정 형량을 강화한 ‘윤창호법’의 주인공. 그의 친구들이 주도해 사고 3개월 만에 법을 바꾸는 기적 같은 일을 목도하며 고인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됐다.

중·고교와 대학 친구들은 “만약 내가 음주운전 차에 치였다면 창호는 벌써 국회로 달려갔을 것”이라고 고인을 소개했다. 시험 때면 자신의 요점 정리 노트를 반 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공부 안 하려는 친구를 도서관으로 끌고 가던 청년. 자기 잇속 챙기기에도 바쁜 시대에 항상 동료의 손을 잡아 이끌던 창호의 카톡 프로필 사진은 고교 땐 검찰청, 대학 땐 청와대였다. “검사가 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 “대통령이 되어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목표를 다짐하며 친구들의 본보기가 됐던 것이다. 말 그대로 공익 대표자의 자질을 보인 청년이 검사 또는 정치인의 꿈을 이뤘다면 얼마나 멋진 모습이었을까. 당시 ‘윤창호 대통령’이라는 작은따옴표 속 칼럼 제목으로나마 그를 추모했다.

그렇다. 검사였던 정치인에게 기대를 거는 이유는 그들의 초심(初心) 때문이다. 검사 선서에, 윤창호의 프로필에 담긴 열정과 책임감 때문이다. 직업과 소명을 동일시한 사상가 막스 베버의 관점에 가장 부합하는 직업인들이 그들 아닐까. 베버가 말한 ‘직업(소명)으로서의 정치’에 가장 적합한 인간군(群)인 것이다.

그들이 정치권에 몰려온다. 일부 언론에 따르면 역대 최대인 50여 명의 전·현직 검사가 22대 국회의원 선거(4월 10일)에 도전한다고 한다. 일부 현직 검사는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준비하다가 부적절한 언행을 했다는 의혹으로 검찰총장이 지시한 특별감찰을 받는 일도 생겼다. 문재인 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검사장급도 사표가 수리되지 않은 상태로 출마를 암시하는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들 대부분은 검사의 ‘정치적 중립’을 외면했다는 이유로 비판받지만, 이젠 하나의 ‘입직 트렌드’로 인정하는 게 맞다고 본다. 이전 선거에도 검사 경력자가 30~40명 정도였으니, 가창력 탁월한 가수가 뮤지컬이나 영화에 나오고 유명 배우가 예능에 진출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넘치는 끼를 다른 무대에서 폭발시키듯, 공직자의 열정이 ‘정치적 중립’이라는 한계에 부닥치자 더 큰 세상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는 게 현실적이다.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검사를 뗀 맨 이름, 맨몸으로 ‘공익의 대표자’의 자질을 검증받게 되기 때문이다. 과연 소명의 직업인이었는지, 공명심(功名心)에 사로잡힌 속물이었는지가 만천하에 드러난다. 다른 진영의 정치인으로 변신한 ‘동료검사시민’은 서로의 진정성을 검증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초심으로 읊었던 검사선서는 언제든 이율배반과 내로남불의 증거가 된다.

막스 베버를 다시 인용하자면, 직업으로서의 정치가에게 필요한 세 가지(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중 최소 한 가지는 부족했음을 조만간 깨닫게 될 것이다. 사투리와 표준말로 이분해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그 결핍을 어떻게 보완해 갈 것인지가 관건이다. 너무도 많은 실패 사례를 봤기에, 순진무구한 기대감은 오늘도 모래 위의 성처럼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