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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나면 어쩌라는 거냐"…LH 영구임대 90%엔 스프링클러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2일 오전 50대 남성이 숨진 군포 영구임대아파트 화재 현장에서 소방 화재조사관이 현장을 둘러 보고 있다. 취약계층 주거 복지를 위한 LH 영구임대아파트의 90.1%가 스프링클러 설치 미대상인 것으로 조사됐다. 손성배 기자

지난 2일 오전 50대 남성이 숨진 군포 영구임대아파트 화재 현장에서 소방 화재조사관이 현장을 둘러 보고 있다. 취약계층 주거 복지를 위한 LH 영구임대아파트의 90.1%가 스프링클러 설치 미대상인 것으로 조사됐다. 손성배 기자

“천장에서 물 나오는 그거(스프링클러)는 없다. 거동 불편한 부인이랑 불나면 어쩔 도리 있겠나.”

경기 광교신도시의 한국토지주택공사(LH) 국민임대아파트에 사는 문모(82) 할아버지는 스프링클러가 집 안에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문 할아버지는 “할매가 걷지를 못 해서 임대주택 1층만 찾아다니고 있다”며 “내 기력도 전 같지 않아서 불나면 속절없이 타 죽을 판”이라고 말했다.

1992년 12월 사용승인을 받아 31년 된 수원 우만주공3단지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정모(71) 할머니도 “불나면 대피하는 요령을 경로당에서 계속 얘기하는데, 다들 다리가 불편해 제때 피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불나면 알아서 천장에서 물이 나오는 건 없지만, 부엌에 가스 불이 시간 지나면 자동으로 꺼지는 장치는 있다”고 했다.

연일 공동주택 화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LH가 취약 계층 주거 복지를 위해 운영하는 영구임대주택 10곳 중 9곳꼴로 대표적인 소화설비인 스프링클러가 없어 화재 안전에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8일 LH 등에 따르면 전국의 LH 건설 임대아파트 1151단지 중 471단지(40.9%)에 스프링클러가 없다. 국민임대는 661단지 중 278단지(42.1%)로 평균을 웃돌았고, 영구임대는 단지 132곳 중 119곳(90.1%)이 입주(사용승인) 당시 스프링클러 의무 설치 대상이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 2일 오전 화재로 50대 남성이 숨진 군포 가야주공5단지도 스프링클러 의무 설치가 아닌 1993년 6월 사용승인을 받은 30년 된 구축 영구임대아파트였다.

경기 오산의 한 국민임대주택 호실 내 부엌 천장에 설치된 화재경보기(오른쪽)와 스프링클러. 손성배 기자

경기 오산의 한 국민임대주택 호실 내 부엌 천장에 설치된 화재경보기(오른쪽)와 스프링클러. 손성배 기자

이번 화재에 대해 군포 가야주공5단지 주민 문모(67)씨는 “스프링클러가 있었으면 불이 금방 꺼졌을 건데, 초기에 불을 못 잡아서 1시간 넘게 활활 탔다”며 “소화기도 층마다 작은 거 1~2개밖에 없다. 못사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차별하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LH 임대주택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지 않은 공동주택은 소방 관련법에 따라 사업승인 시점을 기준으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1992년 7월 28일부터 16층 이상의 층에 스프링클러 설비를 적용해야 한다는 조항이 소방법 시행령에 삽입됐고, 2005년 1월부턴 11층 이상 건물의 전층에, 2018년 1월 27일부턴 6층 이상 건물 전층으로 점차 강화됐다.

스프링클러의 화재 피해 경감 효과는 실제 증명됐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는 2017년 1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자동 소화설비가 943건 작동해 9조8000억원의 재산 피해를 줄였다고 집계했는데, 이중 스프링클러의 효과가 921건, 9조6000억원으로 97.6%를 차지했다.

하지만 구축 아파트에 스프링클러 설치를 법령으로 강제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천장 높이 등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해 마땅한 대책이 없다고 소방방재 전문가는 말한다. 김엽래 경민대 소방안전관리과 교수는 “스프링클러는 가장 효과가 확실한 소화설비인데, 화재 안전 기준이 강화되기 이전 지어져 스프링클러가 없는 옛날 아파트는 대부분 안전하지 않다고 봐도 무방하다”며 “불을 쓰는 부엌에 자동확산소화기를 설치하거나 안방, 거실에 자동소화장치를 개별 설치할 순 있겠으나 근본 대책이라고 할 순 없다”고 설명했다.

경기 수원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경로당 부엌에 온도가 72℃ 이상 감지되면 소화 분말을 분사하는 자동확산소화기와 가스타이머콕이 설치돼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화재 안전을 위해 스프링클러 미설치 단지에 가스타이머콕을 달아주고 원하는 세대엔 자동확산소화기도 설치하고 있다. 손성배 기자

경기 수원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경로당 부엌에 온도가 72℃ 이상 감지되면 소화 분말을 분사하는 자동확산소화기와 가스타이머콕이 설치돼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화재 안전을 위해 스프링클러 미설치 단지에 가스타이머콕을 달아주고 원하는 세대엔 자동확산소화기도 설치하고 있다. 손성배 기자

LH도 당장 구축 임대아파트에 스프링클러 추가 시공은 천장 높이를 2.2m 이상으로 해야 한다는 주택건설기준규칙에도 맞지 않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대신 화재 방지를 위해 가스타이머콕을 스프링클러 미설치 단지 세대에 전면 보급하고 자동확산소화기 설치를 권장하는 등 화재 대책을 시행 중이다.

이영은 LH 토지주택연구원 주택주거연구실장은 “세대 내 간이스프링클러를 설치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각 호실당 90만원 이상 돈이 들어간다”며 “구축 임대아파트의 경우 화재 안전과 환경 개선을 위해 계속 사업비를 투입해 고쳐 쓸지, 리모델링하거나 철거한 뒤 새로 짓는 재정비(재건축)를 할지 장기적인 로드맵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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