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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몰래 켜둔 통화 자동녹음...남편 돈선거 들통나도 무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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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 녹음 관련 이미지. 중앙포토·연합뉴스

휴대전화 녹음 관련 이미지. 중앙포토·연합뉴스

아내가 몰래 남편의 휴대전화 자동녹음 기능을 켜 둔 탓에 모든 통화가 녹음됐다면 모두 형사사건의 증거로 쓸 수 있을까. 이 중 남편-아내 간 통화는 증거로 쓸 수 있지만, 남편과 제삼자인 타인 간 통화는 증거로 쓸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사건은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농협·수협·산림조합 전국동시조합장 선거가 있었는데 경찰청은 이를 잘 살펴보란 지침을 내렸다. 남해 해경은 김용실씨가 부산시 수협조합장으로 당선된 배경으로 ‘돈 선거’를 의심했다. 김씨의 주요 조력자인 A씨가 수사 선상에 올랐다. 경찰은 그가 속칭 ‘말’로 불리는, 조합원들에게 직접 금품을 살포하는 역할을 한 선거 참모라고 의심했다. 압수영장을 받아 A씨 휴대전화를 뒤져봤는데 실제 관련한 통화 녹음파일이 무더기로 나왔다. 몇 년 전 A씨의 아내가 남편의 여자관계를 의심해 휴대전화에 있는 T전화 자동녹음 기능을 몰래 켜 둔 덕분이었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조합장에 당선한 김씨와 선거를 도운 A씨 등 5명을 기소했다. 당선을 위해 표를 돈으로 사려 했고 포섭할 어촌계 선거인 명단을 만들어 돈을 준 혐의(금전 제공으로 인한 위탁선거법 위반)가 핵심이었다. 부둣가에서, 어판장에서, 놀이터에서 만나 10~20만원씩 건넸다는 것이다. 증언이나 CCTV 등 다른 증거도 있었지만, A씨 휴대폰에서 나온 통화 녹음파일도 단연 혐의 입증에 도움이 됐다. A씨가 선거기간 아내나 다른 선거운동원과 전화로 나눈 대화에 관련 정황이 고스란히 담겼기 때문이다.

동의 없이 녹음한 타인 간 대화는 불법 감청…“증거 못 써” 

통화 녹음은 수사기관엔 뜻밖의 선물이었으나 A씨·김씨 등 피고인들에겐 재앙이었다. 피고인들은 녹음파일 모두 불법 감청의 결과라며 증거로 쓰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1심 부산지법 서부지원은 검찰이 낸 통화 녹음파일 모두를 증거로 인정했는데, 2심 부산고법은 A씨가 다른 피고인과 한 통화에 한해선 증거능력을 배제했다. A씨와 아내의 통화는 일방이 동의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A씨와 다른 통화 상대방의 경우 동의 없이 녹음한 것이므로 불법 감청이 맞다고 봤다. 이 덕에 김씨 혐의 중 사전선거 운동 부분은 무죄로 바뀌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돈 선거’ 혐의는 다른 증거로도 입증된다고 봐 유죄가 유지됐고 형량은 오히려 늘었다(징역 1년 2개월→징역 1년 4개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뉴스1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뉴스1

1·2심에서 모두 증거로 인정된 A씨와 아내 사이 통화 녹음은 상고심까지 쟁점이 됐다. A씨는 아내와 자주 통화하며 지금 뭐를 하는지 실시간 보고했는데 “단속에 걸려도 김씨가 정리해준다고 했다” “지금 한 반 정도 (돈을) 돌렸다” 같은 얘기가 녹음됐다.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지난달 14일 상고를 기각하며 “A씨의 전화통화 녹음파일 중 A씨와 아내 사이 전화통화 부분은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A씨의 형량은 1·2·3심을 거치며 달라진 게 없었다(징역 8개월).

일방이 녹음했더라도 사생활 비밀·인격 침해 정도 따져야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대화에 끼지 않은 사람이 몰래 녹음하는 건 불법 감청이지만, 대화에 참여한 사람이 상대방 모르게 녹음하는 건 불법은 아니다. 다만 불법 감청이 아닌 사적 대화라 해도 증거로 쓰려면 살펴야 할 것이 있다. 대법원은 “아내가 A씨의 동의 없이 A씨의 휴대전화를 조작해 통화내용을 녹음하였다는 점에서 아내가 A씨의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을 침해하였다고 볼 여지는 있다”면서도, “아내는 전화통화의 일방 당사자로 A씨와 직접 대화를 나누며 A씨가 말하는 걸 들었으므로, 아내가 통화내용을 몰래 녹음했더라도 그로 인해 A씨의 사생활의 비밀이나 대화의 비밀이 침해됐다고 평가하긴 어렵고 음성권 등 인격적 이익의 침해 정도도 경미하다”고 봤다.

대법원은 또 ▶아내가 (불법 선거) 범행 관련 증거로 사용하려는 의도로 녹음한 것도 아니고 ▶수사기관이 녹음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적법하게 압수한 휴대전화를 분석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수집 과정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또 ▶’돈 선거’를 조장하는 중대범죄와 관련한 수사·재판에서 ▶은밀히 이뤄지는 선거범죄 특성상 범행 내용을 밝혀줄 수 있는 객관적 증거인 통화 녹음파일을 증거로 써야 할 필요성이 높다고 봤다.

대법원 공보연구관실은 이날 판결에 대해 “A씨와 아내 간 통화와 관련해선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이 중대하게 침해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긴 하지만, 이는 불법 감청이 아닌 경우라 하더라도 녹음 경위나 내용에 따라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한 경우라면 증거로 쓸 수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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