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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시각각

노무현 대통령을 존경한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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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아름다운 꽃이 피지도 못하고 말라 죽을 운명에 처했다.”

노무현 정부 후반인 2006년 8월 ‘비전 2030’이 발표된 다음 날, 당시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이 대통령 관저에 올라가 차가운 언론 반응을 보고하자 노무현 대통령이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언론 비판은 변 실장이 “상상을 초월했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2030이 무슨 치약 이름이냐는 신문 만평까지 나왔다.(변양균, 『노무현의 따뜻한 경제학』)

비전 2030은 변 실장이 기획예산처 장관 시절부터 준비한, 30년 시계(視界)의 장기 재정계획이었다. 대통령 공식 보고만 세 차례, 비공식 서면보고도 세 번이나 했을 정도로 노 대통령의 관심이 컸다. 변 실장은 “사실상 대통령이 작업반장이었다”고 썼다.

‘비전2030’ 작업반장은 노 대통령
혹평 받았지만 갈수록 높은 평가
윤 정부도 ‘재정비전 2050’ 내놔야

장기전망 보고서는 이전 김영삼·김대중 정부도 만들기는 했다. 비전 2030은 보고서를 만든 주체가 달랐다. 과거엔 연구기관이나 학자들이 주축인 위원회에서 주도했다면 비전 2030은 정부 조직인 기획예산처가 직접 작성했다. 재정 투입이 전제된 실효성 있는 계획이라고 볼 수 있다. 최소한 2020년엔 서유럽보다는 복지 지출 규모가 작은 편인 2001년의 미국·일본 수준으로, 2030년엔 영국·폴란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1100조원의 재정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았다. “세금 폭탄” “현실성 없는 생색내기용 정책”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변 실장은 오해라고 했다. 1100조원은 물가를 반영한 경상가격이고 25년간 발생하는 총 국내총생산(GDP)의 2% 수준이다. 불변가격으로 계산하면 연평균 16조원, 보고서가 나왔던 2006년 예산의 7%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비전 2030으로 혹평을 받은 이듬해인 2007년 10월 지방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런 발언을 남겼다. “하여튼 세금 올리자는 이야기를 아무도 안 한 데 대해 저는 아주 심각한 유감을 갖고, 저도 못 올리고, 올려보지도 못하고 ‘돈이 이만큼 필요할 것이다’라고 계산서 내놓았다가 박살 나게 또 맞고 물러간다.”

변 실장은 2022년 본지에 연재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소통 부족을 후회했다. “내용 못지않게 소통이 중요하다. 보고서 내용만 충실하게 잘 만들려고 한 게 패착이었다. ‘잘 만들면 잘 받아들여지겠지’ 이런 섣부른 생각이 비전 2030을 망쳤다. (중략) 좋은 정책을 내놓는 것보다 제대로 알리고 공감을 끌어내는 게 더 중요했다.”

노무현 정부로선 비운의 보고서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평가가 후해졌다. 뒤이은 보수 정권인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동반성장, 무상보육, 근로장려세제(EITC) 등의 정책을 펴는 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됐다. 증세 논의의 장을 연 것도 의미 있었다. 물론 비전 2030이 증세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증세와 국채 발행, 증세+국채라는 옵션이 있으며 국민이 선택할 문제라고 한발 물러섰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인 2022년 6월 새 정부가 발표한 경제정책 방향의 한 귀퉁이에 ‘재정비전 2050’ 수립이 들어 있었다. 5년 단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넘어 재정의 중장기 지속 가능성 확보를 위해 재정의 미래상과 구체적 액션 플랜을 내놓겠다고 했다. 참 반가웠다. 그런데 지난해 초 나온다던 재정비전 2050이 상반기로, 또 하반기로 늦춰지더니,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미래를 대비하는 중장기 정책을 짜는 기획재정부의 ‘기획’ 기능을 살리겠다고 언급했다. 그게 ‘기획’재정부의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비전 2030이 나올 수 있던 건 노무현 대통령의 끊임없는 관심과 독려 덕분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는 윤석열 대통령이라면 왠지 비전 2030 못지않은 재정비전 2050이 나오도록 응원하고 분위기를 조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자본시장에만 예민한 용산에선 국가 미래가 달린 재정비전 2050에는 별 관심이 없는 눈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