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형구의 USA 오디세이

'선거의 해' 여론조사 제대로 읽는 법…“조사 방식·시기·후원 살펴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김형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형구 워싱턴 특파원

김형구 워싱턴 특파원

“여론조사들이 이번에는 완전히 틀렸습니다. 많은 조사들이 힐러리 클린턴 후보 지지율을 과대평가한 오류가 있었습니다.”

2016년 미국 대선 때 여론조사업체 대다수가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당선을 예상했지만 결과가 다르게 나오자 미국 여론조사연합회(AAPOR)가 ‘실패’를 인정하며 낸 반성문의 일부다. 당시 LA타임스 등 극소수 매체를 빼곤 대부분 클린턴 후보가 득표율은 물론 선거인단 수에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꺾고 낙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일인 2020년 11월 3일(현지시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한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이른 아침부터 투표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 대통령 선거일인 2020년 11월 3일(현지시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한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이른 아침부터 투표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AFP=연합뉴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트럼프 후보가 득표율에서는 클린턴 후보에 45.98% 대 48.08%로 밀렸지만 선거인단(538명) 절반을 훌쩍 넘는 304명을 확보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CNN 정치담당 기자 출신 앵커 마이크 태퍼는 “여론조사 업계는 줄줄이 문 닫을 것”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미국에서 ‘여론조사 신화의 붕괴’로 기록된 2016년 대선 때 일이다.

2016년 미 대선 예측 실패올해는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24년. 올해는 가히 지구촌 선거의 해다. 한국의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4·10)를 비롯해 전 세계 약 40개국에서 전국 단위 선거가 치러진다. 투표권을 행사하게 될 사람 수만 대략 30억이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초강대국 미국 대통령 선거다. 양강 구도를 그리는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그리고 후발 주자들의 경쟁이 11월 5일 투표일까지 치열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미 대선이 열리는 해인 만큼 여론조사가 홍수처럼 쏟아질 게 뻔하다. 그러나 2016년 미 대선 때와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난무하는 여론조사 속에서 불필요한 ‘노이즈’(잡음)를 걸러내고 유의미한 ‘시그널’(신호)을 읽는 방법은 뭘까. 주목해서 봐야 할 조사는 무엇이고, 비판적 시각으로 봐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 도움이 될 만한 ‘여론조사 제대로 읽는 법’ 가이드가 최근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소개됐다.

유선전화 줄고 패널 조사 대세  

폴리티코는 먼저 여론조사 방식의 변화가 갖는 의미를 주목했다. 과거와 달라진 조사 ‘방식’이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다. 20여 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 거의 모든 여론조사는 지역별로 전화번호를 무작위로 돌려 진행했다. 집집마다 유선전화가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랜덤 유선전화 조사는 이제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대신 상당수 여론조사업체들은 유권자 파일을 활용한다. 가령 CNN은 등록 유권자 파일에 적힌 주소지로 우편을 발송해 각 주별 응답자를 확보한 뒤 온라인으로 설문조사를 벌이는 방식을 쓴다. 대부분의 다른 온라인 여론조사는 기존에 확보한 설문조사 패널을 활용하는데, 이 패널에는 (당원) 등록 유권자뿐만 아니라 일반 유권자도 두루 포함돼 있다. 정확도는 무작위 전화 조사 방식보다 등록 유권자 파일에서 추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가 더 높다는 게 정설이다.

한국에서도 유선전화 조사 방식이 갖는 한계가 뚜렷해지면서 최근 여론조사 결과 공표 규정에 변화가 생겼다. 중앙선관위 산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지난해 12월 1일부터 ‘선거여론조사기준’ 개정 규칙에 따라 유선전화만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는 공표 및 보도를 할 수 없게 했다. 유선전화 응답률이 고령ㆍ보수층에서 상대적으로 높아 편향적일 수 있다는 지적에 따른 조치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격차 오차범위 내면 ‘사실상 동률’

폴리티코가 강조한 두 번째 여론조사 가이드는 오차범위의 함정에 유의하라는 것이다. 예컨대 지난달 19일 발표된 뉴욕타임스(NYT)ㆍ시에나대의 대선 주자 지지율 조사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46%)이 바이든 대통령(44%)을 2%포인트 앞선다고 할 경우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치는 아니라는 얘기다. 폴리티코는 두 후보 간 지지율 격차가 오차범위보다 작으면 뚜렷한 1위가 없다는 것이며 이 경우 ‘박빙’이나 ‘사실상 동률’로 표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건 오차범위가 두 후보 지지율 모두에 적용된다는 점이다. NYTㆍ시에나대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는 ±3.7%포인트였다. 이에 따라 이 조사의 트럼프 지지율은 42.3~49.7%, 바이든 지지율은 40.3~47.7%라고 봐야 한다. 즉 바이든이 최대치인 47.7%, 트럼프가 최소치인 42.3%일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반대로 바이든이 최소치인 40.3%, 트럼프가 최대치인 49.7%일 가능성도 있다.

두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오차범위를 벗어날 때는 ‘앞서고 있다’는 표현이 가능하다. 폴리티코는 “격차가 오차범위의 1~2배 사이인 경우 ‘약간 우세하다’고 할 수 있고 오차범위의 2배 이상이면 ‘상당히 우세하다’고 볼 수 있다”고 안내했다.

의뢰처 변수 ‘하우스 이펙트’

여론조사를 정확하게 보기 위해선 누가 후원했는지도 살펴야 한다고 폴리티코는 강조했다. 특정 후보자나 정당, 당파성이 강한 미디어 매체 또는 외부 단체가 의뢰한 여론조사는 정파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다. 여론조사를 의뢰하거나 수행하는 곳의 성향이 조사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하우스 이펙트’(House Effect) 때문이다. 누군가 특정 의도를 갖고 질문의 표현 방식이나 구성에 변화를 주어 원하는 방향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유권자들이 유념해야 한다.

여론조사를 벌인 시기도 유의미한 변수가 될 수 있다.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뉴스 이벤트가 조사 전후에 있었는지도 살펴야 한다는 얘기다. 또 응답률이 높은 특정 계층을 대상으로 단 하루 동안만 실시된 조사라면 쏠림 효과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폴리티코는 이들 여러 유의사항과 함께 가장 중요한 룰이 ‘인내심’이라고 강조했다. 폴리티코는 “한 번의 여론조사 결과를 갖고 섣부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신중한 태도가 아니다”며 “어떤 식으로든 더 많은 증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