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높이 폐지로 5000원 번 노인…주민은 "냄새난다" 실랑이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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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찾은 서울 강서구 한 시장 뒷골목 옆 공중화장실 근처엔 베이지색 천막으로 가려진 공간이 있었다. 천막을 걷으니 자물쇠로 잠긴 문이 나왔다. 폐지와 고철 등을 수거해 생계를 잇는 장모(75)씨가 3년 전쯤 마련한 공간이다. 그가 ‘비밀 창고’라고 부른 이곳엔 고물상에 내다 팔 자전거와 텔레비전부터 맥주 캔 같은 고철이 모여있었다.

천막으로 공간을 감출뿐만 아니라 천만 뒤엔 자물쇠로 잠긴 문도 있어, 고물상에 내다팔 자전거와 텔레비전부터 맥주 캔 등 고물이 도난 당할 우려가 적다. 이찬규 기자

천막으로 공간을 감출뿐만 아니라 천만 뒤엔 자물쇠로 잠긴 문도 있어, 고물상에 내다팔 자전거와 텔레비전부터 맥주 캔 등 고물이 도난 당할 우려가 적다. 이찬규 기자

장씨가 고철 창고를 만든 건 한 번에 옮겨 팔기 위해서다. 장씨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고물상은 700여m 떨어진 곳이다. 가는 길 골목 경사도 급하다. 보통 집에서 고물상까지 20~30분 정도 소요되는데, 여러 번 오가기 힘겹다. 텔레비전 등 가전제품은 플라스틱·고철 등으로 나눠서 팔아야 해서 분해하기 위해서도 이곳에 둔다.

한꺼번에 많이 팔면 고물상에서 몇백원씩 더 챙겨주기도 한다. 강서구에서 고물상을 운영하는 A씨(43)는 “걷는 것도 불편한 노인분들이 자기보다 무거운 고물을 가져올 때면, 마음이 안쓰럽기도 하다. ‘수고했다’는 의미로 200원 정도 더 쳐준다”고 말했다.

폐지수집 노인들은 사각지대를 찾아 다세대주택 기둥 뒤편에 폐지나 고철 등을 쌓아두며 폐지를 은닉한다. 이찬규 기자

폐지수집 노인들은 사각지대를 찾아 다세대주택 기둥 뒤편에 폐지나 고철 등을 쌓아두며 폐지를 은닉한다. 이찬규 기자

하지만 모아둔 폐지와 고철을 도둑맞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고물 수거 노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보니 박스테이프를 떼고 정리해둔 박스가 사라졌다”, “운동기구에서 철 부분만 분리해둔 걸 누군가 가져갔다”고 성토했다. 장씨도 누군가 모아둔 고물을 훔쳐가자 천막과 자물쇠를 마련했다. 장씨는 “폐지보다 값이 비싼 고철류를 주로 도둑맞았다”며 “폐쇄회로(CC)TV를 살 돈은 없고, 주워온 천막과 자물쇠로 도난을 막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폐지수집 노인들은 사각지대를 찾아 다세대주택 기둥 뒤편에 폐지나 고철 등을 쌓아두며 폐지를 은닉한다. 김모(69)씨에 따르면 그는 '훔쳐가지마세요'라고 적었지만 '훔쳐가지'로 지운 뒤, 폐지를 훔쳐갔다고 한다. 이찬규 기자

폐지수집 노인들은 사각지대를 찾아 다세대주택 기둥 뒤편에 폐지나 고철 등을 쌓아두며 폐지를 은닉한다. 김모(69)씨에 따르면 그는 '훔쳐가지마세요'라고 적었지만 '훔쳐가지'로 지운 뒤, 폐지를 훔쳐갔다고 한다. 이찬규 기자

화곡동에서 폐지 등을 수거하는 김모(69)씨는 “하루 종일 움직여도 팔기 민망할 정도로 수집량이 적어 3~4일 모아 고물상에 간다”며 “기둥에 ‘훔쳐가지 마세요’라고 적어놨는데, 누군가 글자 일부를 지워서 ‘훔쳐가지’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기껏 다 정리해둔 걸 뺏어가니 억울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고물을 숨기는 다양한 방법이 등장했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지형과 도구를 이용해 은닉하는 것이다. 다세대주택 기둥 뒤편 같은 사각지대를 찾아 폐지나 고철을 쌓아두는 방식이다. 주차장에 장기 주차된 차량 뒤에 고철을 두고 천막으로 가리기도 한다. 비용도 들지 않고 쉽게 장소를 마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골목 구석구석을 살피는 다른 노인들 눈에 띌 위험이 크다.

반지하에 마련된 작은 창고엔 쇠로 된 토스트기, 가스레인지 등 가전제품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찬규 기자

반지하에 마련된 작은 창고엔 쇠로 된 토스트기, 가스레인지 등 가전제품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찬규 기자

주민들이 허락한다면 보다 안전하게 고물을 수집·보관할 수 있다. 사용하지 않는 다세대주택 지하층이나 창고 등에 문을 잠그고 보관하는 식이다. 정모(81)씨가 보여준 한 주택 반지하의 작은 창고 안엔 쇠로 된 토스트기와 가스레인지 등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20년 동안 살다 보니, 이웃들이 내 형편을 잘 알고 있어 지하 창고를 쓰게 배려해줬다”고 말했다.

주민과 갈등을 겪는 경우도 많다. 화곡동 한 다세대 주택 앞엔 ‘박스 놓지 마세요’라고 적힌 종이가 붙었다. 한 노인이 폐지를 쌓아두곤 했는데, 한 주민이 이를 막기 위해 붙인 것이다. 주민 B씨(54)는 “주차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미관상 보기 좋지 않다”며 “박스 정리할 때 나는 부스럭 소리조차 듣기 싫다”고 말했다.

폐지수거 노인들이 모아둔 고물 때문에 종종 주민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서울 화곡동의 한 다세대 주택엔 ‘박스 놓지 마세요’라고 적힌 종이가 붙었다. 이찬규 기자

폐지수거 노인들이 모아둔 고물 때문에 종종 주민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서울 화곡동의 한 다세대 주택엔 ‘박스 놓지 마세요’라고 적힌 종이가 붙었다. 이찬규 기자

냄새는 갈등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서울 영등포동에 거주하는 C씨는 “여름만 되면 어르신이 가져온 폐지와 고철에서 나오는 냄새가 집 안까지 풍긴다”며 “여름 내내 문을 닫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 폐지수거 노인은 “폐지 쌓아두는 것을 불편해하는 이웃이 있어서 하루 줍고 하루 판 지 2년쯤 됐다”고 말했다.

이같은 고충에도 노인들이 폐지·고물 수집을 할 수밖에 없는 건 생계를 유지할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소득도 매우 적다. 지난해 12월 정부가 처음 실시한 ‘2023 폐지수집 노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폐지 수거 노인의 월평균 개인소득은 기초연금 등을 포함해 74만2000원이었다. 전체 노인의 월평균 개인소득(129만8000원)의 57% 수준이다. 하루 평균 5.4시간, 일주일에 평균 6번씩 폐지 수거하지만 수입은 하루 6225원, 월 15만9000원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키보다 높이 박스를 쌓아올린 이모(68)씨는 3일 동안 모은 폐지 71kg을 팔아 5000원을 받았다. 1kg당 약 70원 꼴이다. 이찬규 기자

자신의 키보다 높이 박스를 쌓아올린 이모(68)씨는 3일 동안 모은 폐지 71kg을 팔아 5000원을 받았다. 1kg당 약 70원 꼴이다. 이찬규 기자

이날 박스를 자신의 키보다 높이 쌓아 올렸던 이모(68)씨는 사흘 모은 폐지 71㎏을 판매하고 5000원을 받았다. 1㎏당 70원씩 계산하면 4970원이지만, 고물상에서 5000원짜리 지폐 한장을 줬다. 이씨는 “폐지만 팔며 월 평균 6만원 정도 받는 것 같다. 연금 외엔 유일한 수입원”이라고 말했다.

폐지 수거는 정부가 지원하는 '노인 공공일자리' 중 하나다. 다만 월 30시간 이상 일한 것을 입증해야 정부가 27만원을 추가로 지급한다. 하지만 대부분 고령인 점을 고려해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인들이 무거운 고물 수집을 월 30시간씩 하면 건강을 해칠 수 있다”며 “연금 등 사회복지지원 확대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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