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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관둔 테너, 오페라 무대서 폭탄 품은 까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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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2호 20면

[비욘드 스테이지] 창작뮤지컬 신작 ‘일 테노레’ 

홍광호

홍광호

지난해 티켓 판매액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시장규모 5000억원 돌파가 전망되는 뮤지컬 시장은 지금 해외 명품 대잔치다. 팬데믹 기간 억눌렸던 소비 심리가 살아나고 시장이 부활하자 그간 손실이 컸던 공연 제작사들이 검증된 대표작으로 손실을 가열차게 만회하고 있어서다. 8년 만에 돌아온 명작 중의 명작 ‘레미제라블’을 필두로 신시컴퍼니 비장의 레퍼토리 ‘렌트’, 오디컴퍼니의 ‘드라큘라’ 10주년 공연 등 저마다 총력전이다. EMK뮤지컬컴퍼니는 ‘시스터액트’ ‘몬테크리스토’ ‘레베카’ 등 무려 세 작품을 돌리고 있고, 곧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가세한다. 조승우 캐스팅으로 화제였던 에스앤코의 ‘오페라의 유령’도 1년째 전국투어를 돌고 있다.

춘추전국시대 전쟁터 같은 시장에 용감하게 뛰어든 대형 창작뮤지컬 신작 한 편이 있다. 지난 연말 막 올린 ‘일 테노레’(2월 25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다. 브로드웨이에서 라이선스 초연을 준비 중인 베스트셀러 창작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만든 박천휴 작가-윌 애런슨 작곡가 콤비가 2018년 우란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낭독 공연으로 선보인 지 5년 만에 빛을 보는 본공연이다.

윤이선 역 홍광호는 완벽한 벨칸토 발성으로 조선 최초 테너의 위엄을 과시한다. [사진 오디컴퍼니]

윤이선 역 홍광호는 완벽한 벨칸토 발성으로 조선 최초 테너의 위엄을 과시한다. [사진 오디컴퍼니]

흥행이 불투명한 신작 초연에 공연계 블루칩인 김동연 연출과 오필영 무대디자이너까지 ‘창작 드림팀’을 꾸린 건 굴지의 제작사 오디컴퍼니다. ‘지킬앤하이드’ ‘맨오브라만차’ 등 라이선스 대작들로 국내 뮤지컬 산업의 성장을 견인해 온 흥행마술사 신춘수 대표의 새로운 도전이라 더 주목된다. 현재 뉴욕 현지에서 개발한 ‘위대한 개츠비’로 브로드웨이 입성을 앞두고 있는 그가 국내에서 오래 공들여 내놓은 신작인 만큼, 우리 뮤지컬계의 변화를 암시하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일 테노레’는 이탈리아어로 ‘테너’라는 뜻으로, 국내 최초의 테너 이인선을 모티브 삼아 일제강점기 조선 최초의 오페라 무대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다. 의사이기도 했던 이인선은 1934년 밀라노 유학을 떠나 3년 동안 세계적인 테너 티토 스키파의 은사 에밀리오 피콜리의 가르침을 받고 돌아와 ‘동양의 스키파’로 불렸고, 해방 후 조선오페라협회를 조직해 1948년 명동 시공관에서 첫 전막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올린 한국 오페라의 개척자다. 그런데 ‘연희의전 출신 국내 최초 테너’라는 주인공 캐릭터를 빼면 나머지 등장인물과 이야기는 완전한 픽션이다.

신성민

신성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신참 아티스트가 열악한 환경에서 좌충우돌하며 무대를 만들어가는 우여곡절은 뮤지컬의 흔한 소재다. 저 유명한 ‘브로드웨이42번가’ ‘물랑루즈’도 그런 이야기로 레전드 반열에 올랐다. ‘일 테노레’는 우리 이야기라서 특별하다. 요즘 뮤지컬계 화두인 글로벌 시장 진출 면에서도 탁월한 소재 선택이다. 만국공통어라 할 수 있는 오페라 아리아를 활용해 무대를 만들어 가는 친숙한 스토리라인에 우리 역사의 특수성을 녹여낸 영리한 기획이다.

때는 1930년대 말, 일제 총독부가 조선인들의 정신을 통제하기 위해 검열을 강화하던 시대다. 공부밖에 몰랐던 얌전한 의대생 윤이선(홍광호·박은태·서경수)이 우연히 자신의 특별한 목소리에 눈을 떠 조선 최초의 테너를 꿈꾸게 되는데, 독립운동 단체 ‘문학회’ 회원인 서진연(박지연·김지현·홍지희)과 이수한(신성민·전재홍)도 애국심 고취를 위한 연극을 준비하다 이선과 함께 오페라를 만들기로 한다. 오스트리아 제국에 맞선 이탈리아 독립운동가들의 꿈을 노래한 무대로 검열을 피하고 일본인 후원자들을 ‘엿 먹이려는’ 계획이다. 제작비 마련을 위해 골든레코드사의 오디션에 참가한 이선은 소심한 성격을 극복하고 놀라운 퍼포먼스로 제작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여기까지 1막. 솔직히 특별한 건 없었다. 뉴욕에서 성공한 노년의 테너가 젊은 날을 회상하며 무대를 열고,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한 의대생이 사랑에 눈뜨고, 숨겨진 재능을 발견해 오페라 무대에 도전하기까지…. 경쾌한 호흡으로 흘러가는 무대의 만듦새가 몹시 매끄러운 정도다. 총독부의 방해공작에도 꿋꿋이 무대를 완성하고 사랑도 이루는 훈훈한 해피엔딩을 누구나 예상할 법하다.

박지연

박지연

그런데 2막은 우리의 예상을 계속 배반한다. 뉴욕 오페라단 입단을 꿈꾸며 오페라 무대를 만들어가는 이선과 그 무대에서 폭탄 투척을 추진하는 진연과 수한, 거기에 뛰어난 오페라로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겠다는 프로듀서의 야심까지, 동상이몽 세 트랙이 맞물려 돌아가며 긴장감이 고조된다. 시대상을 고려할 때 진연의 걸크러시가 개연성이 떨어지지만, 지금의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캐릭터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전개 끝에 만나는 반전도 충격적이다. 국내 최초 테너의 일대기인 척, 그가 사랑한 여성 독립운동가에게 부르는 찬가랄까.

하지만 오페라를 향한 음악가의 꿈 자체가 이 무대를 끌고 가는 동력임에는 틀림없다. ‘연극하지 말고 무력으로 싸우자’는 수한과 ‘이선의 특별한 목소리가 나라 밖까지 항일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진연의 대화가 예술의 힘을 직설하기도 한다. 메인 테마곡으로 러닝타임 내내 흐르는 아름다운 아리아 ‘꿈의 무게’는 새로 작곡된 뮤지컬 넘버임에도 마치 실제 존재하는 오페라 아리아인 듯 친숙한 멜로디여서 중독성이 강하다.

‘특별한 목소리’를 시연하는 윤이선 역 배우들의 퍼포먼스도 한몫 한다. 특히 ‘일 테노레’라는 제목에 걸맞게 완벽한 벨칸토 발성으로 저음역대와 고음역대, 가성과 진성을 넘나들며 웬만한 성악가도 울고 갈 실력을 과시하는 홍광호는 과연 뮤지컬계 ‘가창력 본좌’였다.

압권은 완성도다. 창작 초연이기에 저렴한 제작비로 어딘지 아쉽게 만든 게 아니라, 초장부터 아낌없이 쏟아 부어 춘추전국 전쟁터에 뛰어든 제작자의 자신감이 느껴진다. 연극·뮤지컬 공연장을 한순간에 꿈의 오페라극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무대미술도 감동적이다. 내내 고정돼 있던 무대가 클라이맥스에 처음으로 빙그르르 돌며 오페라극장 프로시니엄(액자형) 무대의 새빨간 커튼이 나타나는 순간의 두근거림이라니. 1000석 규모의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포문을 연 ‘일 테노레’가 머지않아 바로 한층 아래 2300석 규모의 오페라극장에 당당히 입성할 날이 올거라 예고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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