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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외교연구 중 올해 가장 불확실…한국, 정쟁할 때 아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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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2호 28면

신기욱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장의 정세 진단

신기욱 교수는 “외교는 이를 악물고 철저하게 국익 관점에서 봐야 한다”며 대중 정책에서 가치외교만 고집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사진 신기욱]

신기욱 교수는 “외교는 이를 악물고 철저하게 국익 관점에서 봐야 한다”며 대중 정책에서 가치외교만 고집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사진 신기욱]

“미국에서 40년째 연구 생활을 하고 있는데, 올해가 가장 불확실성이 큰 해다. 유럽·중동에서 진행 중인 ‘두 개의 전쟁’도 그렇고, ‘트럼프 시즌 2’ 가 현실화할 경우 일어날 변화도 그렇다. 복합적 위기의 한 해가 될 터인데, 한국이 이를 잘 넘기려면 무엇보다 국내 정치 리더십 확립이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 정치가 지금처럼 거칠거나 양극화된 적이 없어 걱정이다.”

신기욱 스탠퍼드대 교수와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막힘없이 나오는 진단이다. 외교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한국 정치에 대한 걱정이 나왔다. 외교는 내치(內治)의 연장이라고 했던가.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Walter H. Shorenstein Asia-Pacific Research Center)를 20년째 이끌고 있는 저명 국제정치학자의 입에서 나온 고언은 “국가의 생존이 걸린 대외 정책에서는 여야 정쟁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에는 한국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다른 국가 프로그램도 있는데 이 전체를 중국이나 일본계가 아닌 한국계 신 교수가 소장직을 맡아 책임지고 있다. 새해 벽두 신교수로부터 올해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불확실성과 한국 외교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들었다.

한·중, 학생교류·관광객교류 더 늘려야

윤석열 정부가 출범 3년차를 맞는다. 외교 부문에 국한해 ‘중간 평가’를 한다면.
“현재까지 윤 정부의 가장 큰 성과는 한·일관계를 복원한 것이다. 미·중 경쟁 시대의 국제 상황에서 외교적, 안보적, 이념적으로 한국과 가장 많은 전략적 시각을 공유하는 국가는 당연히 일본이다. 저출산·인구 감소·노령화 등 한국이 직면한 사회 문제에서도 일본은 참고할 대상이다.”
지난 11월 윤 대통령이 기시다 일본 총리와 함께 스탠퍼드대에서 좌담회를 가졌다.
“미국 대학에서 한·일 정상이 그런 만남을 가진 것은 역사적이다. 처음 있는 일이다. 우리 연구소에서 기획을 했고 많은 준비를 했다. 한·일 갈등의 역사 문제 보다는 인공지능, 반도체 등 첨단 기술 그리고 미래 전략에 대해서 정상 간 서로 많은 얘기를 했다. 가까이서 보니까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케미’가 좋은 것 같았다. ‘김대중-오부치’ 만남을 보는 것 같았다.”
윤 정부는 2023년 4월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발표한 ‘워싱턴 선언’을 다른 주요 성과로 뽑는데.
“그렇긴 한데, 실은 미국이 원하는 것을 더 가져간 것이다. ”
무슨 뜻인가.
“워싱턴 선언의 핵심은 미국의 핵우산을 강화한다며 ‘컨설팅 그룹’을 만든 것이다. 미국으로선 비등하는 한국의 핵무장 여론을 다독거리며 핵 비확산 관리 정책을 잘 유지한 것이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어떤가.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권리를 일본 수준으로는 받아냈어야 했다. 일본은 마음만 먹으면 6개월 내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다고 한다. 미·일원자력협정을 통해 플루토늄 재처리 등으로 핵무기 원료를 확보해둔 덕분이다. 한국이 일본 수준의 핵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한미원자력협정의 개정을 요구했어야 했다.”
한국이 결국 핵무장의 길로 가야 한다는 의미인가.
“한반도가 핵화(核化) 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 고민은 해야 한다. 현재 한·미 관계가 굳건하지만 향후 안보 환경이 급변해 미국이 한국의 핵우산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불확실한 안보 상황에 대비해 일본 수준의 핵잠재력은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한·일 모두 미국에게는 중요한 동맹인데 한국이 상대적으로 경시된다면 정당하게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미국의 반대 입장은 확고한데.
“당연하다. 하지만 아무리 동맹관계라 해도 미국 국익 중심으로 가는 것이다. 한·미가 잘 지내면서도 한국이 챙길 것은 잘 챙겨야 한다. ”
윤석열 외교에서 또다른 아쉬운 점은.
“한·일관계를 복원하고 한·미·일 관계를 강화했으면 당연히 이것을 전략적 지렛대로 써야 한다. 자연히 눈길이 가는 곳은 중국과의 관계인데 그쪽으로는 노력이 미진했다. 한·미·일 공조 강화에 공을 들인 점은 잘했지만 한쪽으로만 치우친 점은 아쉽다. 중국에 대해서도 좀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에서 반중 감정이 80% 정도로 매우 높다.
“외교는 이를 악물고 철저하게 국익 관점에서 봐야 한다. 북한 문제, 대만 문제, 경제 문제 등 한·중 간 소통해야 할 사안이 산적해 있다. 국제적 자유질서를 수호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는 것도 옳은 방향이지만 대중정책에서 가치외교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유럽과 달리 아시아에선 ‘민주주의 vs. 권위주의’ 프레임이 큰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한국 사람들도 이웃인 중국의 중요성을 인정하긴 한다. 그럼에도 그간 중국에 누적된 감정의 생채기가 깊은 것도 사실이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실질적 조치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국은 오랜 역사적 관계로 인해 반중 정서의 체감 온도가 다른 나라들보다 더 높다. 그 중에는 팩트에 기반한 것도 있고, 일부는 오해도 있다. 양국이 적어도 오해로 빚어진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소통해 바로 잡아야 한다. 중국도 성의를 보여야 한다. 그럴려면 인적 교류부터 늘려야 한다. 현재 중국에 가는 한국 유학생 숫자가 팬데믹 이전의 5분의 1로 줄었다. 적어도 학생 교류와 관광객 교류는 양국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교류가 줄면 없는 오해도 생기는 법이다.”

대외정책만큼은 정쟁 멈추고 협력해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16일 미국 뉴햄프셔주 더럼에서 열린 선거 유세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16일 미국 뉴햄프셔주 더럼에서 열린 선거 유세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한·중 마찰이 최근 더 불거진 원인으로 대만 문제가 꼽힌다. 대만과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악화에 대비한 한국의 선제적 옵션이 있을까.
“만약 중국이 정말로 대만을 침공할 계획을 내부적으로 결정하는 단계까지 간다면 한국이 그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긴장 완화 역할을 할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과 기본적인 신뢰관계가 있어야 한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한 이유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근 ‘남조선 영토 평정’ 등 거친 언사를 쏟아내고 있다.
“우발적 충돌을 넘어 허를 찌르는, 고도로 기획된 군사도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위기관리를 잘 해야 한다. 한국이 9·19 남북 군사합의를 파기한 것에 대해서는 미국 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우려가 나왔다. 한국이 북한을 공격할 것도 아닌데 구태여 파기할 필요까지 있었나 싶다. 깨기는 쉬운데 다시 복원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
북한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도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보나.
“2010년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은 남북이 강대강 대치를 하면서 긴장 수위가 그 때보다 더 높다. 더구나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도 커졌다. 허풍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옮길 가능성을 무시하면 안된다. ”
한국 국내 분위기는 그렇게 심각한 우려는 하지 않는 것 같은데 …
“그것이 문제다. 몇 달 전 대만을 방문했는데 대만 사람들도 ‘설마 중국이 침공하겠어’라는 분위기여서 놀랐다. 더불어 우려되는 것은 미국도 대선 국면에 접어들면서 거의 북한 문제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북한에게는 더 없이 좋은 도발 기회가 될 수 있다.”
트럼프 재당선 가능성이 가시화되고 있다.
“트럼프가 만일 재집권한다면 1기에 비해 더욱 강력한 힘으로 자신의 어젠다를 밀어붙일 것으로 보인다. 일단 4년간의 경험이 있고 재선에 대한 부담이 없으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로 팀을 짤 것이다. 전문성보다는 충성도가 중요하고 전문가보다는 정치적 인사들로 채워질 듯하다. 정치적 보복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미국 대통령이 갖고 있는 힘은 국내보다는 대외 정책에서 더 강력하기 때문에 한국도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럼 ‘트럼프 2기’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우선 트럼프 1기 정책을 잘 분석하길 조언한다. 또한 트럼피즘을 떠받치고 있는 미국의 사회구조적 상황도 면밀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1기에서 일본은 아베 총리의 개인기로, 한국은 북한에 대한 공통 관심사로 인해 위기를 넘겼는데 2기도 여전히 불안하다. 트럼프와의 ‘케미’가 중요할 것이다. 한·미 정상간의 공통 관심사나 취미등을 매개로 좋은 ‘케미’를 만드는 방법도 고민해야 한다.”
올해 한국 외교안보 어젠다는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 하나.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다. 지난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 회의 기간에 미국과 일본은 시진핑과 정상회담을 했지만 윤 대통령은 하지 못했다. 대단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한에도 관여 정책을 병행해야 한다. 대북 억지력을 강화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만 한다면 외교부가 필요없다. 국방부만 있으면 된다.”
신 교수의 연구테마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다. 한국에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피습당했다.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조언은.
“한국 정치를 지난 수십 년 동안 지켜봐 왔지만 지금처럼 거칠거나 양극화된 적은 없었다. 이번 사건이 정치 지도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서로를 경쟁자가 아닌 적으로 보고 악마화하는 정치가 문제다. 국내외적으로 복합적 위기를 맞는 한 해가 될 터인데, 이를 잘 넘기려면 무엇보다 정치 리더십 확립이 중요하다. 대한민국의 생존이 걸려있는 만큼, 최소한 대외정책에 있어서 만큼은 여야 정쟁을 멈추고 미래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고 협력해야 할 때다.”

이성현 조지 H.W. 부시 미중관계기금회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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