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이 지난해 미국시장에서 165만대를 팔아치워 역대 최고 실적을 냈다. ‘중산층 국민차’ 대우를 받으며 미국 시장을 선점한 토요타를 빠르게 추격하면서 또 다른 일본차 혼다·닛산을 따돌리는 모양새다.
4일 현대차 미국판매법인(HMA)과 기아 미국판매법인은 지난해 연간 판매량이 각각 87만370대(제네시스 포함), 78만2451대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그룹 전체로 보면 연간 판매 증가율 12.1%로, 역대 최대 증가폭을 기록했다. 구체적으로는 현대차는 11.5%, 기아는 12.8% 늘었다. 미국 자동차 전문지 오토모티브뉴스는 현대차그룹의 지난해 판매량이 미국 전통 자동차 업체 중 하나인 스텔란티스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했다. 현대차가 미국 시장에서 GM(257만7662대)·토요타(224만8477)·포드(아직 미집계)에 이은 4위로 유력하다는 것. 현대차그룹은 2022년 미국 시장 내 점유율 두 자릿수를 달성한 뒤, 올 상반기 10.6%를 차지하는 등 줄곧 10%대 초반을 유지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판매된 신차는 1550만 대로, 전년보다 13% 증가했다. 미국 자동차 시장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글로벌 공급망 타격→차량용 반도체 부족→인플레이션·고금리 등으로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지난해 다시 살아났다. 신차 가격이 코로나19 이전보다 높긴 하지만, 자동차 업체들이 재고 판촉 행사를 적극적으로 펼친 게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미국 신차 시장에서 일본 5개 자동차 회사(토요타·혼다·닛산·스바루·마쯔다, 각사 발표)의 지난해 판매량은 총 554만대에 이른다. 토요타는 224만대로, 총 판매량에선 현대차그룹(165만2821대)보다 많았지만, 전년 대비 성장률은 6.6%로 현대차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현대차·기아의 지난해 급성장 비결은 다음 세가지로 꼽힌다.
비결① 소매 판매 12% 증가…패밀리카 입지↑
현대차그룹의 소매 판매는 전년보다 12% 증가했다. 랜디 파커 HMA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기록적인 소매 판매량을 기록했는데, 3년 연속 기록을 갈아치웠다”고 말했다. 현대차·기아가 렌터카·업무용차량 등이 아닌 ‘패밀리카’로 입지를 늘리고 있다는 의미다. 다만 송선재 하나증권 연구원은 “소매판매량이 2019년 대비로는 90% 수준으로 추가 회복의 여지가 있지만, 증가율은 둔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비결② ‘가성비’ 친환경차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좋은 전기·하이브리드차 전략도 먹혀 들었다. 대표주자는 현대차의 아이오닉5다. 지난해 미국에서 3만3918대를 판매했는데, 전년(2만2982대)보다 판매량이 48% 늘어나며 역대 최다 판매 기록을 경신했다. 지난해 아이오닉5의 미국 판매가는 4만2785달러(약 5600만원)부터였는데, 비슷한 체급인 테슬라 모델 Y(4만7490달러, 약 6200만원)보다 약 4700달러(약 600만원)가량 저렴했다. 이밖에 현대의 싼타페 플러그인하이브리드·하이브리드, 투싼 플러그인하이브리드 등과 기아의 EV6, 니로 등 친환경차 라인도 미국 내 성장을 견인했다.
비결③ 미국 SUV와 차별화한 라인업
다양한 SUV 라인도 강점 중 하나다. 21만대 가까이 팔린 현대차의 투싼을 비롯해 싼타페·팰리세이드, 14만대 이상 팔린 기아차의 스포티지 및 텔루라이드·쏘렌토 등이 지난해 잘나갔다. 탱크처럼 ‘무겁고 둔한’ 미국 SUV에 싫증난 소비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는 평가다.
그러나 업계에선 우려도 있다. 현대차가 집중하고 있는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가 점차 둔화하고, 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 이후 현대차의 무기 중 하나인 가격경쟁력도 떨어지고 있어서다. 현대차그룹은 우선 ‘미국산 전기차’를 본격 출시하며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식으로 대응에 나설 전망이다.
내년 11월 치러질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유력주자로 거론되는 것도 현대차엔 고민이다. 아직은 가정이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 경우 올해 가동예정인 조지아주(州) 전기차 전용공장(HMGMA)의 전략도 다시 짜야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 시 IRA를 폐지하고 화석연료 투자를 늘리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론 SDV(소프트웨어로 정의된 차) 생태계를 키우며 제품 경쟁력을 높인다는 방침이다. SDV는 앱 업데이트로 신기능을 사용하는 스마트폰처럼,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차량을 의미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 3일 신년회에서 “최근 SDV전환을 가속하고 있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요소가 품질”이라고 강조했다.
조수홍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올해 미국 자동차 판매는 1600만대에 이를 전망인데, 수요가 회복돼도 성장률 둔화는 불가피하다”며 “특히 금리·환율 변동성 확대, 전기차 가격 경쟁 심화 등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고 내다봤다. 이어서 “다만 현대차그룹은 올해도 두 자릿수 시장점유율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