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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좋은 병원에서 치료받고 싶다는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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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 2일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에서 피습당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헬기로 서울로 이송된 후 다시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지난 2일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에서 피습당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헬기로 서울로 이송된 후 다시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오전 10시 27분 목의 1.5㎝ 열상으로 경정맥 손상이 의심되는 중증 외상 환자 발생. 구급 장비 갖춘 소방차가 출동해 응급조치 취한 후 20여 분 뒤인 10시 49분 구급차 현장 도착. 10㎞ 거리 병원 응급실 대신 14㎞ 떨어진 인근 축구장으로 이동. 11시 4분 119 헬기(소방 응급의료헬기)를 타고 사고지점에서 27㎞ 떨어진 부산대병원 권역외상센터 도착. 응급 조치와 수술에 필요한 검사를 마친 13시 무렵 다시 119 헬기를 타고 410㎞ 떨어진 서울대병원으로 출발. 원래 14시 무렵 도착 예정이었으나 서울대병원 헬기장 공사로 인해 서울 용산구 노들섬 헬기장으로 착륙지점이 바뀌는 바람에 1시간 지연된 15시 도착. 구급차 이용해 18㎞ 떨어진 서울대병원 응급의료센터로 출발해 15시 19분 병원 도착. 15시 45분 수술 시작.

지난 2일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둘러보던 중 "살해 의도로 달려들었다"는 60대 남성의 흉기에 피습당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이날 이송 동선이다. 만약 다른 정보 없이 경로만 알려졌다면 대다수 국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섬뜩한 테러를 규탄한다"며 이 대표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는 한편, "우리나라 응급의료체계가 이렇게까지 엉망이었느냐"며 의사와 병원을 향해서도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을 거 같다. 중증 외상 환자가 무려 총 450㎞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하고 허공에서 지체하느라 사고 발생 5시간을 넘겨서야 수술을 받은 건 누가 봐도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통상 중증 외상 환자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은 1시간 내외다.

지난 2일 이재명 대표가 서울 용산구 노들섬 헬기장에 도착한 후 서울대병원 이송을 위해 구급차로 이동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헬기장 공사로 도착이 지연됐다. 연합뉴스

지난 2일 이재명 대표가 서울 용산구 노들섬 헬기장에 도착한 후 서울대병원 이송을 위해 구급차로 이동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헬기장 공사로 도착이 지연됐다. 연합뉴스

표면상 응급실 뺑뺑이처럼 보이지만 이 비상식적 동선은 의료진·병상 부족에서 파생하는 응급의료체계의 문제나 취약한 지방 의료 인프라 탓에 빚어진 일이 아니었다.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부산대병원 의료진은 대량 출혈 등 이송 중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차단하고자 전원 없이 직접 수술할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서울 행은 향후 일정을 고려한 이 대표 가족과 민주당 측 결정이었다는 얘기다.

부산대 대신 서울대 택한 이재명
민주당 의료정책의 허점 드러내
이념 대신 현실 기댄 진단 내놓길

중증 외상에 관해선 국내 최고인 부산대병원 권역외상센터를 두고 이 대표가 119 헬기 최대 운항 거리(편도 400㎞, 전국 8대인 닥터헬기는 지역에 따라 70~120㎞)를 꽉 채우는 서울대병원까지 이동해 수술받은 소식이 전해지자 적잖은 의사들이 비판을 쏟아냈다. 이들 의사들은 일부 반(反) 이재명 세력의 자작극 음모론이나 증상 부풀리기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촌각을 다투는 응급이 아닌데 세금으로 무상 지원하는 119 헬기를 두 차례나 이용한 것은 특혜가 아니냐"고 지적했다.

SNS에서 이런 논란이 빚어지자 강선우 민주당 대변인은 "테러로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본인 가족이 당해도 중증이 아니라거나 특혜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며 "정치색이 달라도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선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인물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당장 큰 봉변을 당한 사람을 두고 너무 야박하다는 마음일 것이다.

아마 대다수 국민 역시 강 대변인 주장에 동의할 거라 본다. 다친 사람이 있으면 절차상 잘잘못을 따져 묻기 전에 치료부터 하는 게 우선이다. 또 강 대변인 지적대로 내 가족이 다쳤다면 당장 생사의 기로에 놓인 위중한 상태는 아닐지라도, 아니 그 정도로 긴박하지 않으니 오히려 수백 ㎞를 헬기로 이동해서라도 최고의 병원이라 생각하는 곳에서 수술받기 원할 거다. 인지상정이기는 한데, 지난 2004년 KTX 개통 이후 지방 사람들이 인근에 크고 좋은 병원이 있어도 서울의 빅5 병원만 찾는 통에 수도권 쏠림이라는 기형적인 의료 왜곡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민주당이 추진해온 일련의 의료 정책들을 보면 보통 사람들의 이런 바람과 욕망을 무시한 채 이념에 경도돼 엉뚱한 해법만 내놓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우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가령 지난해 '지역·필수 의료 살리기 TF'까지 만들어 무리한 지역의사제와 공공의대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배경에는 지방에 의사와 병원이 없다는 진단이 깔려 있었다. 이를 토대로 헌법상 자유를 침해하든 말든 지방 붙박이 의사를 만들고 공공병원을 더 짓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의도치 않게 이번 사건으로 민주당 진단과 해법의 허점을 드러낸 셈이 됐다.

욕망을 부인하고 이념이나 당위에만 기대는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특혜를 따져묻는 사람들에게 발끈하기 전에 민주당이 그걸 깨닫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