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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와 금각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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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위성욱 기자 중앙일보 부산총국장
위성욱 부산총국장

위성욱 부산총국장

일본, 그중에서도 역사 도시로 불리는 교토를 처음 방문한 외국 관광객이라면 꼭 가는 필수 코스가 있다. 바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금각사(金閣寺)다.

최근 밀양 영남루(嶺南樓)가 국보로 재지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무 연관도 없어 보이는 이 ‘금각사’와 경남 진주 촉석루(矗石樓)가 겹쳐 떠올랐다. 각종 자료를 찾아보니 이 두 건축물이 동시에 떠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비슷한 시기에 소실돼 다시 지어졌지만 한 곳(금각사)은 ‘금 그릇’처럼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 국보였던 촉석루는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평양 부벽루(浮碧樓), 밀양 영남루(嶺南樓)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명루로 꼽혔던 진주 촉석루(矗石樓) 모습. 백종현 기자

평양 부벽루(浮碧樓), 밀양 영남루(嶺南樓)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명루로 꼽혔던 진주 촉석루(矗石樓) 모습. 백종현 기자

거칠게 요약하면 1397년 건축된 금각사는 1950년 방화로 대부분 소실됐다. 당시 이 절의 방화 소식은 일본 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불을 지른 행자승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다”고 범행동기를 밝히면서다. 주목할 점은 이후 복원 과정이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았던 금각사는 5년 뒤 1차 복원됐지만 서둘러 복원해 군데군데 금박이 떨어져 나가 ‘금각’이 아니라 ‘흑각’이라는 야유도 받았다. 하지만 이후 2·3차 복원공사를 거쳐 1999년 현재의 금각사로 재탄생했다. 불탄 지 50년째 되던 해다.

반면 평양 부벽루(浮碧樓), 영남루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명루로 손꼽혔던 진주 촉석루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전소된 후 재건됐다. 하지만 아직도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1960년 재건됐을 당시만 해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방문할 정도로 전국적인 이목을 끌었지만, 1956년 국보에서 해제된 후 아직 그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1983년 문화재 지정 심의가 이뤄졌지만, 문화재 가운데 가장 하위 등급에 해당하는 경남도 문화재 자료 제8호에 그쳤다. 이후 2004년과 2014년 두 차례 국보 환원 대시민 운동이 전개됐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나마 2020년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666호에 지정된 게 전부다. 여러 가지 사유가 있지만 “건축 연대가 짧고 재건축으로 원형과

달라졌다”는 게 이런 대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하지만 일본 금각사가 불탄 이후 이를 재건하기 위해 일본 사회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조금만 살펴보면 촉석루가 국보로 환원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록 촉석루가 전소해 완벽한 원형으로 보존된 것은 아니지만, 촉석루는 고려 고종 때인 1241년 창건된 후 사실상 1000년 가까이 기적적으로 생존한 우리나라 누각 건축물의 상징이다. 또 진주대첩과 논개, 김시민 장군 등으로 대변되는 촉석루의 역사성과 상징성은 화재로도 소실되지 않는 불변의 가치다. 그것만으로도 진주 촉석루를 국보로 승격하자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위성욱 부산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