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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체류자도 ‘아묻따’ 무료 치료…외국인 6만명에 새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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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안과 전문의 정근 그린닥터스 이사장이 국제진료소를 방문한 외국인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사진 그린닥터스]

지난달 24일 안과 전문의 정근 그린닥터스 이사장이 국제진료소를 방문한 외국인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사진 그린닥터스]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꼭 낫게 해주세요.”

지난달 24일 부산시 부산진구 온종합병원 6층 진료센터를 찾은 중국인 여성 A(75)가 이같이 통사정했다. 그는 눈이 침침한 증세가 있는데도 넉넉지 않은 형편에 병원비가 걱정돼 치료를 미뤄왔다고 한다. 다행히 A의 딸이 이런 처지의 외국인을 무료로 진료해주는 병원을 알게 됐고, A는 병원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안과 전문의인 정근 그린닥터스 이사장이 진료했더니 2m 안 사물도 제대로 못 볼 만큼 백내장이 심해져 있었다. A는 이달 중 정 원장의 병원에서 무료로 수술을 받는다.

매주 일요일(5번째 일요일 미운영) 온종합병원엔 A처럼 국내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나 그 가족 등이 수십명씩 몰린다. 재단법인 그린닥터스가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운영하는 ‘외국인 국제진료소’를 찾기 위해서다. 국제진료소는 2003년 문을 열었다.

중국이나 베트남 등지에서 3년 기한의 취업비자를 받아 우리나라에 구직하러 오는 외국인이 점차 늘던 때다. 부산의 경우 이들은 사상·강서구 등지의 제품 생산 공장에 주로 취업했다. 하지만 열악한 근무 환경 속에 일하다 다치고, 병치레 탓에 오히려 빚이 늘자 한국을 떠나지 못한 채 불법체류자가 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닥터스는 이런 이들을 위해 진료소를 열고, 꼭 필요한 정보 이외 신상명세에 대해선 ‘아묻따’(아무 조건도 묻거나 따지지 않는 것) 원칙을 지켜 이들을 돌봤다.

국제진료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기승을 부린 2020년 6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를 제외하고 현장을 지켰다. 현재는 탈북민, 다문화가정 구성원도 치료한다. 지난 20년간 6만여명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진료과목은 안과 외 정형외과·내과·소아청소년과·치과 등이 있다. 주로 근골격계 환자나 눈·치아 관련 질환자, 원인 모를 알레르기·두통 등을 앓는 환자가 내원한다고 한다. 그린닥터스 소속 전문의들이 일요일마다 2~3명씩 번갈아가며 이들을 진료한다. 약사 1명과 간호사 1명, 자원봉사자 20명도 함께 이들 환자를 돌본다. 한국국제교류재단도 매주 러시아·베트남·중국어 통역 인력 3명을 진료소로 보낸다.

국제진료소에서는 피·소변검사부터 엑스레이 촬영, 약 처방까지 이뤄진다. 장기·집중치료가 필요한 환자는 대학병원 의료 지원 등과 연계하거나 외래진료로 돌린다. 그린닥터스 관계자는 “진료비는 부산시 보조금 2100만원과 재단 자체 재원을 더해 연간 3300만원”이라며 “보험 혜택이 없는 외국인의 외래진료 비용도 이 재원에서 충당한다”고 밝혔다.

그린닥터스는 2004년 재단법인으로 등록하고 의료 봉사를 이어왔다. 지난해 2월 규모 7.0 강진이 덮친 튀르키예에, 2022년 5월엔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캠프에 의료지원단을 보냈다. 스리랑카와 중국 쓰촨성, 네팔 등지의 대지진 때도 같은 활동을 했다. 정근 그린닥터스 이사장은 “의술은 인종과 국경, 종교를 가리지 않는다. 올해도 국제진료소 운영과 해외 지원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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