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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72화. 그라운드호그 데이

중앙일보

입력

반복되는 하루, 그 끝은 어디일까

필 코너스는 미국 한 방송국의 기상 예보사입니다. 뉴스 시간에 날씨를 소개하는 게 일이죠. 다양한 정보를 통해 전해지는 날씨는 사람들의 생활엔 매우 중요하지만, 사실 그렇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도 이 일을 그다지 좋아하거나 즐기는 건 아니죠. 그냥 일이니까 할 뿐. 하지만 그가 기상 예보사 일보다 싫어하는 게 있으니, 매년 2월 2일 펜실베이니아의 펑서토니에서 열리는 그라운드호그 데이 행사 취재예요. 그라운드호그(Groundhog), 땅돼지라고 불리는 커다란 땅다람쥐 마못이 겨울이 얼마나 계속될지를 점치는 행사죠. 전승에 따르면 이날 마못이 동면에서 깨어나는데, 날씨가 맑으면 자기 그림자를 보고 놀라서 둥지로 도망친다고 해요. 반대로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내리면 둥지를 떠나 활발하게 활동하죠. 그래서 마못이 그림자를 보면 겨울이 6주간 계속되는 것을 아쉬워하고, 그림자를 보지 못하면 봄이 다가왔다고 기뻐하는 날. 그것이 바로 ‘그라운드호그 데이’입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주인공은 겨울이 얼마나 남았는지 점치는 행사, 그라운드호그 데이를 취재하며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겨울이 더 오래 계속될지도 모르지만, 끝나지 않는 겨울은 없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주인공은 겨울이 얼마나 남았는지 점치는 행사, 그라운드호그 데이를 취재하며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겨울이 더 오래 계속될지도 모르지만, 끝나지 않는 겨울은 없다.

미국·캐나다 각지에서 진행되는 행사 중 가장 유명한 펑서토니 행사의 마못은 필이라고 불리는데 실제론 ‘점쟁이 중의 점쟁이, 현자 중의 현자,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희귀한 기상 예보자, 펑서토니 필’이라는 긴 이름이 있어요. 그의 아내 필리스는 ‘땅다람쥐의 비약’으로 수명을 연장하면서 처음 행사가 시작된 19세기 말부터 계속 살고 있다고 하죠. 뛰어난 기상 예보사인 펑서토니 필은 날씨를 예측하는 능력이 있어서 ‘땅다람쥐 언어’로 날씨를 알린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진행자만이 특별한 힘으로 이 언어를 알아듣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거죠.

상당히 재미있고 신비해 보이지만, 시골 작은 도시에서 열리는 행사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 자신을 도시의 유명 인사라고 생각하는 주인공으로선 촌구석에서 열리는 별 대단치도 않은 행사에 매년 가야 하는 게 불만이죠. 당연히 진행도 건성건성, 동료들은 행사를 좀 더 취재하자고 하지만 빨리 돌아가고 싶은 그는 길을 재촉하죠.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길이 봉쇄된 것이죠. 결국 동료와 함께 마을에서 하루 더 머무르게 되는데요. 다음 날 기묘한 일이 일어납니다. 어째서인지 라디오에서 ‘그라운드호그 데이’를 알리는 거예요. 어제 내린 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맑은 날씨고, 행사장에선 흥겨운 음악이 들려오죠. 펑서토니 필이 구멍에서 나오고 겨울이 6주간 계속된다고 말하고… 그렇게 어제 일어난 일이 똑같이 벌어집니다. 폭설로 떠나지 못하는 것도요.

처음엔 그냥 자기 기억이 잘못되었다고 여겼지만 이내 그렇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에도 여전히 2월 2일 그라운드호그 데이였기 때문이죠. 당황한 주인공은 어떻게든 펑서토니를, 2월 2일을 벗어나려 하지만 맘대로 되지 않아요.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면, 그냥 오늘을 즐기면 되지.’ 온갖 수를 써도 실패한 그는 마음을 바꿉니다. 반복되는 하루를 자기 뜻대로 살아가려 한 것이죠. 오랜만에 만난 동창의 얼굴을 후려치고, 건강 걱정 없이 맘껏 먹고 마시고, 돈도 펑펑 써요. 수중에 돈이 부족해도 걱정 없죠. 사람들의 행동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는 그가 돈주머니를 훔치는 것쯤은 별것 아니니까요.

하지만 즐거움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절망한 그는 자살을 택하지만, 여전히 2월 2일에 깨어나요. 지친 그는 동료에게 사실을 밝히죠. 동료는 놀라워하면서도 그와 함께 하루를 보내기로 해요. 동료는 말합니다. "저주가 아닐지도 몰라요. 난 오늘 즐거운 하루를 보냈어요. 괜찮으면 다음에 또 하죠." 그리고 그의 삶은 달라집니다. 2월 2일이 계속되는 건 마찬가지지만, 조금이라도 나은 하루를 위해 노력해요. 무슨 일을 하건 같은 날이 반복될 뿐이지만, 그래도 남들에겐 기억에 남을 특별한 날을 선사하고자 한 것이죠.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시간을 쓰기로 하면서 그 자신도 더욱 나아져 가고, 어느새 특별한 하루는 막을 내립니다. 겨울이 떠나고 봄이 다가오는 것이죠.

땅다람쥐 마못이 자기 그림자를 보면 겨울이 6주간 계속된다며 아쉬워하는 행사,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봄비와 관련 있습니다. 찬 기운이 가득한 겨울은 건조하고 맑은 날씨가 이어지지만, 따뜻한 공기가 밀려오면 찬 공기와 부딪쳐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개구리가 깨어나고 천둥과 함께 봄비가 내린다는 우리나라의 절기, 경칩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식이 ‘그라운드호그 데이’라는 행사로 정착된 것은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오는, 평범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일 거예요. 매년 반복되는 사실에 조금이라도 의미를 주고, 언젠가 봄이 찾아올 것이라는 즐거움을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죠.

‘뭐든 다른 건 좋지.’ 기나긴 2월 2일이 끝나고 2월 3일이 시작되었을 때, 주인공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특별한 시간을 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하죠. 기나긴 학기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었습니다. 남에 의해 반복되는 시간이 아닌, 여러분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죠. 이번 겨울은 얼마나 특별한 시간, 얼마나 다른 하루가 될까요? 그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점을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알려줍니다.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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