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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봉투 값도 못냈다"…북적이던 송탄터미널, 쓸쓸한 폐업 [르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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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1989년 개장한 경기 평택 송탄시외버스터미널이 이용객 감소로 운영 적자가 커져 1일 폐업한다. 영업 마지막 날인 지난해 12월 31일 오후 송탄터미널 버스 정류장의 모습. 장서윤 기자

1989년 개장한 경기 평택 송탄시외버스터미널이 이용객 감소로 운영 적자가 커져 1일 폐업한다. 영업 마지막 날인 지난해 12월 31일 오후 송탄터미널 버스 정류장의 모습. 장서윤 기자

“예전엔 굉장했지. 분식이라는 게 빨리 나오고 빨리 먹고 가는 음식이잖아. 버스 타기 전에 손님들 내가 많이 먹여 보냈지. 추우면 여기서 먹으면서 기다리고. 연말 되면 어디 가는 사람들로 터미널이 꽉 찼어. 북적북적 연말 분위기가 났었는데….”

2023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오후, 경기 평택 송탄시외버스터미널 바로 앞에서 22년째 김밥집을 운영 중인 구광모(57)씨가 읊조렸다. 이날은 34년 만에 문을 닫는 터미널의 마지막 영업 날이다. 곁에는 시외버스 기사들이 매일 같이 와서 먹고 이름을 적은 장부가 쓰러진 채 쌓여있었다. 구씨는 2002년 월드컵 때 가게를 열어 터미널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1000원의 행복’을 선물해왔다. 1000원이던 김밥 한 줄은 어느새 3000원이 됐고, ‘김밥나라 송탄터미널점’이란 가게 이름처럼 항상 곁에 있을 것 같은 터미널이 사라진다. 구씨는 “초등학생 시절 와서 먹던 애들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온다. 어떤 애는 대학생이 되고, 어떤 애는 사회인이 돼서 오면 ‘내가 오래 하기는 했나 보다’ 하고 뿌듯했는데, 이제는 못 본다니 그게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31일 오후 경기 평택 송탄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김밥집 사장 구광모(57)씨가 김밥을 말며 터미널의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구씨는 ″예전 연말에는 사람이 북적거려 연말 분위기가 났는데 올해는 유독 쓸쓸하다″고 말했다. 장서윤 기자

지난해 12월 31일 오후 경기 평택 송탄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김밥집 사장 구광모(57)씨가 김밥을 말며 터미널의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구씨는 ″예전 연말에는 사람이 북적거려 연말 분위기가 났는데 올해는 유독 쓸쓸하다″고 말했다. 장서윤 기자

매일 1200명 기댄 송탄터미널 ‘마지막 날’

지난해 12월 31일을 끝으로 영업을 종료한 경기 평택 송탄터미널 내부 모습. 매표소에 걸려있던 현수막이 떨어지고 승객이 거의 없어 한산한 모습이다. 장서윤 기자

지난해 12월 31일을 끝으로 영업을 종료한 경기 평택 송탄터미널 내부 모습. 매표소에 걸려있던 현수막이 떨어지고 승객이 거의 없어 한산한 모습이다. 장서윤 기자

터미널 내부는 안내문 없이도 폐업을 짐작게 할 정도로 쓸쓸했다. 전날까지 내걸렸던 ‘매표소 폐쇄 안내’ 현수막이 떨어지고, 딱딱한 4인용 의자는 뒤집힌 채 쌓여있었다. 난방도 꺼져 냉랭한 분위기 속 대합실 구석엔 먼지만이 나뒹굴었다. 그래도 이곳을 거쳐 떠나는 마지막 승객 2~3명이 대합실 자리를 지켰다. 해외 출장을 위해 터미널에서 인천공항행 시외버스를 기다리던 이준희(25)씨는 “어릴 때부터 오던 곳인데 이렇게 사람이 없는 풍경은 처음 본다. 건물이 버려지는 느낌이 나서 슬프다”고 말했다.

1989년 문을 연 송탄터미널은 34년 동안 시민들의 발 역할을 했다. 수년 전까지 10평 남짓 작은 대합실에 직원 6명이 상주하며 표도 직접 팔고, 승객들을 안내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승객 수가 줄어든 데다, 모바일 앱을 통한 발권이 늘면서 대합실에 머무는 유동 인구도 줄었다. 그러자 상가 임대료가 급감하고 경영이 악화하면서 지난해 1월부터 매표소 대신 무인발권기가 자리 잡았다. 운영 업체 김범수 지사장은 “인건비가 안 나오는 상황에서 난방비, 전기세, 쓰레기봉투 등 최소한의 유지비도 감당하기 어려워 폐업하게 됐다”고 말했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 1200여명에 달하던 하루 이용객은 지금은 100명 미만, 버스 노선도 19개에서 10개로 쪼그라들었다.

지난해 12월 31일 영업 마지막 날인 경기 평택 송탄터미널에 4인용 장의자가 뒤집혀 쌓여있다. 장서윤 기자

지난해 12월 31일 영업 마지막 날인 경기 평택 송탄터미널에 4인용 장의자가 뒤집혀 쌓여있다. 장서윤 기자

매일 평택과 동서울을 오가며 승객을 실어나르는 버스 기사 나성국(60)씨는 “승객들이 거의 다 출퇴근하는 분들인데 ‘당장 새해부터는 어떻게 출근하냐’고 걱정한다. 버스로는 1시간이면 가는데, 지하철론 환승도 하고 2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평택시는 대안으로 터미널에서 동쪽으로 80m 떨어진 도로변에 간이 정류장을 만들고 일부 노선을 유지해 이용객 불편을 최소화한다는 계획이다.

“터미널 없어지면 병원 못 가”…지방 고립 위험

지난해 12월 29일 오전 영월버스터미널을 찾은 승객들이 대합실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김대권 기자

지난해 12월 29일 오전 영월버스터미널을 찾은 승객들이 대합실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김대권 기자

대안 교통수단이 없는 지방 주민들에게 터미널 폐업은 더 두렵다. 1984년에 생겨 39년 동안 강원 영월군의 관문이던 영월버스터미널도 폐업 위기다. 지난달 29일 오전 9시 30분 영월터미널 대합실에서는 승객 3명이 연탄난로 온기를 의지하며 버스를 기다렸다. “제천 가는 게 이게(오전 9시 48분 차) 막차다”, “돌아오는 차도 오후 5시 30분 차가 막차다. 살 수가 없다”는 대화가 오갔다.

영월버스터미널은 코로나19 이후 매표창구를 폐쇄하고 무인 발권기만으로 버스를 예매하도록 하고 있다. 노인들은 ″표를 어떻게 뽑아야 하냐″며 터미널 직원을 찾는 일이 잦다. 김대권 기자

영월버스터미널은 코로나19 이후 매표창구를 폐쇄하고 무인 발권기만으로 버스를 예매하도록 하고 있다. 노인들은 ″표를 어떻게 뽑아야 하냐″며 터미널 직원을 찾는 일이 잦다. 김대권 기자

특히 이날 영월터미널에는 병원을 가려는 노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터미널은 절대 없어지면 안 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입을 모았다. 영월에 병원이 많지 않아 제천·원주까지 통원해야 하는 데 노인들로선 버스 없이는 병원을 못 다닐 상황이기 때문이다. 손모(78·여)씨는 “이빨이 아프고 다리도 아파서 한 달에 대여섯번은 버스를 타는데 터미널이 없어지면 불편해서 못 산다. 없어지면 절대 안 된다”고 연신 말했다.

전국 교통망을 잇는 모세혈관 역할을 하던 터미널이 사라지고 있다. 전국여객자동차터미널사업자협회(터미널협회)에 따르면 전국 버스터미널 수는 2018년 326곳에서 지난해 296곳으로 6년 만에 31곳 줄었다. 송탄터미널이 1일 문을 닫으면 폐업 터미널 수는 총 32곳으로 늘어난다. 지난 한해만 1월에 경기 성남터미널과 전북 익산 고속버스터미널, 6월 경기 고양 화정터미널, 11월 서울 상봉터미널까지 총 4곳이 폐업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내년에는 문 닫는 터미널이 더 많아질 수 있다. 김정훈 터미널협회 사무국장은 “인구 밀도가 낮고, 고령화 비율이 높은 군 소재지 터미널 157곳도 내년에 상당수가 문을 닫을 수 있다”고 했다. 여당은 국민의힘과 국토교통부도 터미널 줄폐업을 막기 위해 지난해 8월 ‘버스·터미널 서비스 안정화 방안 당정협의회’를 열고 시설 규제 완화와 재산세 감면 등을 논의했지만, 수익성을 개선할 묘책은 내놓지 못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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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이 사라지면 지방 고립을 더욱 심화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유정훈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교수는 “터미널이 없어지면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가 없어지는 것”이라며 “일부 지역에선 철도 노선을 무작정 늘리는 것보다 보다 탄력적 대응이 가능한 버스를 존치하는 게 교통복지에도 좋고 효율적”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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