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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틈타 대화 제안하더니 뒤에선 딴짓…北의 변칙접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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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대화 사료집' 제10권 겉표지와 속표지. 통일부 제공, 연합뉴스

'남북대화 사료집' 제10권 겉표지와 속표지. 통일부 제공, 연합뉴스

북한이 1980년 전후 한국의 정치적 혼란(1979년 10·26 사건, 12·12 군사반란,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을 틈타 앞에선 적극적으로 대화를 제안하면서 뒤에서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벌이는 등 혼란을 유발하는 성동격서(聲東擊西)식 대남전술을 구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통일부가 28일 공개한 1980년 전후 남북 간 회담문서에서다.

통일부가 이날 공개한 비공개 회담문서는 「남북대화 사료집」제9·10권에 수록된 1979년 1월부터 1981년 12월까지 남북회담 기록의 일부로, 총 965쪽 분량이다. 해당 사료집에는 ▶남북 간 변칙접촉(3 차례, ’79. 2월~3월) ▶남북 간 탁구협회 회의(4차례, ’79.2월~3월) ▶남북 간 총리회담 실무대표접촉(10차례, ’80.2월~8월) 등의 진행과정과 회의록이 담겼다.

'변칙접촉'으로 통일전선전술 구사한 北

1970년대 중반 북한이 '반공정책 포기', '주한미군 철수' 등 억지 주장을 펼쳐 한동안 끊겼던 남북대화는 "시기·장소·수에 구애받지 말고 무조건 남북한 당국 간 대화를 갖자"는 1979년 1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의 제의에 북한이 반응하면서 이뤄지는 듯했다. 하지만 남북은 같은해 2~3월 판문점에서 3차례의 접촉을 가졌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80년 3월 18일 남북 총리간 회담을 위한 제4차 실무대표접촉이 열리는 판문각으로 이동하는 남한 대표단. 통일부 제공, 연합뉴스

1980년 3월 18일 남북 총리간 회담을 위한 제4차 실무대표접촉이 열리는 판문각으로 이동하는 남한 대표단. 통일부 제공, 연합뉴스

양측이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설치된 남북 간 대화창구인 남북조절위원회(조절위)를 대화 주체로 인정하느냐를 놓고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료집은 남과 북이 대표자격과 의제에 합의하지 못하고 자리만 같이 한 점을 이유로 이를 '변칙접촉'으로 기술했다.

북한은 권준민 노동당 부부장, 이창선 정무원(현 내각) 부장이 대표단으로 나오면서도 노동당 외곽단체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대표 자격이라는 억지를 부렸다. 이에 남측 정홍진 조절위 간사위원은 "정부대표가 나왔으면 정부대표로 다하고 나와야지 정부대표가 나오면서 그 앞에 무슨 조국전선이네 하는 긴 외투를 왜 입고 나오시느냐"며 "그 외투 벗고 나오시지요"라고 항의했다.

이를 두고 남측의 유신 독재로 인해 야당과 학생·시민단체 등이 반발하는 상황을 이용하려는 북한의 전형적인 '통일전선전술'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의 통일전선전술은 이른바 친북세력을 최대한 규합시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통일 논의를 이끌겠다는 것"이라며 "남북대화의 주체를 민간까지 확대시켜 '남남갈등'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1979년 3월에 열린 제2차 변칙접촉 회의록에는 조국전선을 남북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조직의 목적이 소위 '통일전선'의 개념에 근거해 이른바 '남조선혁명'을 추구함으로써 적화통일을 달성하는데 있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

1980년 2월 19일 판문점 판문각에서 열린 남북 총리간 회담을 위한 제2차 실무대표접촉 모습. 통일부 제공, 연합뉴스

1980년 2월 19일 판문점 판문각에서 열린 남북 총리간 회담을 위한 제2차 실무대표접촉 모습. 통일부 제공, 연합뉴스

대화공세 이면엔 '적화통일' 야욕

북한은 12·12 군사반란으로 남측의 정국이 극도로 불안정했던 1980년 초에도 적극적으로 남북대화를 제안했다. 당시 북한은 1월 12일 이종욱 정무원 총리와 김일 부주석 명의로 신현확 국무총리를 비롯한 사회 각계인사 12명에게 대화를 제의하는 서한을 보냈다. 수신자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 김수환 추기경 등 당시 야당·시민단체·종교계 인사들이었다.

정부는 북한의 제의를 받아들일 만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그간 북한에 '남북한의 책임있는 당국자 간 대화'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던 점을 감안해 일단 수용하고 제반 절차 협의를 위한 실무접촉에 나섰다. 하지만 양측은 같은해 2월부터 8월까지 총리 간 대화를 준비하기 위해 10차례의 실무접촉을 열고도 별다른 성과를 도출하지 못했다.

회담 기간이었던 1980년 3월 한강 하류 무장공비 침투사건(23일), 포항 간첩선 침투사건(25일), 김화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27일) 등이 발생하면서 회담 분위기가 급속하게 경색됐기 때문이다. 북한 대표단은 5·18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5월 22일 8차 실무접촉에선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진압 등을 거론하기도 했다.

결국 북한 실무대표단은 1980년 9월24일 방송읕 통해 내놓은 성명에서 "정규군과 땅크(탱크)와 장갑차까지 대량 투입하여 준전쟁의 방식으로 수천명의 광주시민들을 야수적으로 탄압학살하였으며 항쟁의 도시를 동포 형제들의 피로 물들이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했다"고 남측을 비난하며 접촉 중단을 선언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제8기 제9차 전원회의 2일차인 27일 회의에서 "2024년도 투쟁방향에 대한 강령적인 결론을 했다"고 조선중앙TV가 28일 보도했다.사진은 김정은이 조용원 당 조직비서, 최용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주요 간부들과 이동하는 모습. 조선중앙TV 캡처,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제8기 제9차 전원회의 2일차인 27일 회의에서 "2024년도 투쟁방향에 대한 강령적인 결론을 했다"고 조선중앙TV가 28일 보도했다.사진은 김정은이 조용원 당 조직비서, 최용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주요 간부들과 이동하는 모습. 조선중앙TV 캡처, 연합뉴스

한편 북한은 전날인 27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2일차 회의를 진행했다. 노동신문은 이날 관련 보도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쟁준비 완성에 더욱 박차를 가할 데 대한 전투적 과업'을 제시했고, '대외,·대남사업부문의 사업방향을 천명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진 않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한·미·일에 대한 대결 기조를 유지하면서 북·중·러 간 밀착을 강화하는 방향이 논의됐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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