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증류하고 남는게 사랑’ 증류주서 소설 아이디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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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소설 『광인』은 세 남녀의 파멸적인 삼각관계를 그렸다. 이혁진은 “구체적인 체험을 가능케 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김종호 기자

소설 『광인』은 세 남녀의 파멸적인 삼각관계를 그렸다. 이혁진은 “구체적인 체험을 가능케 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김종호 기자

소설가 이혁진(43)은 “리얼리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작가다. 조직의 부조리와 계급주의, ‘먹고사니즘’과 그에 따르는 지리멸렬한 인간관계가 그의 전공이었다. 그런 작가가 예술가의 미친 사랑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지난달 24일 출간한 『광인』(사진)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광인』은 올해 초 방영된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의 원작인 동명 소설로 베스트셀러 차트를 역주행한 소설가 이혁진의 신작 장편 소설이다. 조선소를 배경으로 조직의 생리를 생생히 그려낸 『누운 배』, 은행원의 사내 연애를 소재로 사랑의 방향마저 비틀어버리는 계급의 속성을 파헤친 『사랑의 이해』, 공사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린 『관리자들』 등 전작과는 전혀 다른 색깔이다.

소설은 위스키 양조장을 운영하는 여자 하진, 플루트를 가르치는 남자 준연, 준연에게 플루트를 배우는 남자 해원의 파멸적 삼각관계를 그린다.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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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직장을 배경으로 주변에 한두 명쯤 있을 것 같은 인물들의 세속적인 내면을 그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던 작가가 돌연 뮤지션과 양조가를 내세운 사랑 이야기를 쓴 이유는 뭘까. 지난 18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난 이혁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예술은 아니다”는 답을 내놨다.

“좋은 소설은 리얼하고 핍진한 데서 그치지 않아요. 더 깊숙한, 본질적인 것을 건드리죠. 이를테면 욕망, 사랑, 결핍, 죄의식, 위선 같은 것들요.”

『광인』에는 그것들이 담겼다. 변변찮게 살면서도 끝까지 음악의 꿈을 놓지 않는 준연이 ‘이상’이라면, 주식 투자로 큰 돈을 번 동갑내기 해원은 ‘현실’이고, 음악을 전공했지만 위스키 제조업자로 길을 바꾼 하진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

셋은 위스키와 음악을 사랑한다는 공통점으로 묶여있지만 사실 철저한 타인이다. 소설은 사랑하는 사람이 돌연 타인이 될 때,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고 낯선 행동을 할 때 이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집요하게 묻는다.

“연인이든 가족이든 기대가 크면 관계를 망치게 되잖아요. 기대가 좌절되면 완전히 돌변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런 뒤틀린 관계를 독자들이 소설 속에서 체험하면 좋겠습니다.”

책은 675쪽이다. 단편 위주의 출판 시장에서 ‘벽돌 책’을 쓰면서 느낀 부담은 없었을까. “어느 누구도 ‘해리포터’가 너무 길다고 하지 않잖아요. 좋은 이야기는 길수록 좋죠. 긴 책이지만 길지 않게 느껴지는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이미 짧은 것은 차고 넘치는 세상이잖아요.”

위스키는 작품의 중요한 소재이자 삼각관계의 연결 고리다. 하진의 꿈이자 갈등의 씨앗이기도 하다. 이혁진은 증류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소설의 힌트를 얻었다고 했다. “보리를 증류하면 위스키가 되고 포도를 증류하면 브랜디가 되잖아요. 그게 인간의 감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욕망을 증류한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욕망이 다 증발하고 분리돼도 끝까지 살아남는 것. 가장 강렬하고 순수한 것이니까요.”

독자를 위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소개해 달라는 주문에도 이혁진은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답했다.

“전작 『사랑의 이해』보다 『광인』은 더 내밀하고 어두운 곳까지 들어가요. 독자들에게 직접 경험을 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사랑이 ‘죄’가 될 때까지 이야기를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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