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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선

‘정책 불완전판매’가 낳은 ‘정책 미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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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논설위원

하현옥 논설위원

 정부 말을 철석같이 믿은 게 죄다. 거대 야당의 힘을 무시한 것도 패착이다. 분양가상한제 아파트 계약자의 실거주 의무를 폐지하는 ‘주택법 개정안’이 지난 21일 국회 법안심사소위원회 문턱도 넘지 못하며, 일부 청약 당첨자가 ‘정책 미아’가 될 위기에 처했다. 그뿐만 아니다. 정부의 ‘정책 불완전판매’에 이들은 범법자가 될 판이다.

 일부 청약 당첨자를 ‘정책 미아’로 몰아넣은 건 지난 1월 정부가 발표한 ‘부동산 시장 정상화 방안’이다. ‘1·3대책’으로 불리는 이 방안에서 정부는 분양권 전매 제한을 완화하고 실거주 의무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입주금 마련이 어려운 수요자의 청약 시장 유입’이 당시 정부가 밝힌 해당 대책의 기대효과였다.

 실거주 의무는 ‘부동산 투기와의 전면전’에 나섰던 지난 정부가 수위를 높여온 정책이다.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갭투자 등 각종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수도권 분양가상한제 아파트 청약 당첨자에게도 실거주 의무를 부과했다. 분양받은 사람은 최초 입주일부터 최소 2년 이상 해당 신축 아파트에 실제로 살아야 한다. ‘로또 분양’을 노린 투기 수요를 차단하고 실수요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분위기가 달라진 건 부동산 시장에 찬바람이 불면서다. 고금리 여파로 집값이 하락하고 거래가 줄어드는 등 부동산 시장이 침체하자 정부는 분양권 전매 완화와 실거주 의무 폐지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부의 호언장담 속에 전략은 바로 먹혔다. 미분양 우려에 떨던 주요 분양 단지에 청약이 몰렸다.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재건축 단지인 ‘올림픽파크 포레온’(1만2032가구) 분양은 완판됐다. 분양 시장에는 활기가 돌았다.

지난 4월 주택법 시행령 개정으로 전매 제한은 완화됐다. 문제는 ‘정책 미아’를 낳은 실거주 의무 폐지다. 전매 제한 완화와 달리 실거주 의무 폐지는 주택법 개정 사안이다. 여야 합의를 통해 국회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결국 발목이 잡힌 지점이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토법안심사소위는 이번에도 개정안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실거주 의무 폐지 무산 가능성
정부 발표 믿고 분양 받았지만  
돈 날리고 범법자까지 될 수도

 전매 제한 완화와 실거주 의무 폐지는 패키지 세트다. 전매 제한이 풀려도 실거주 규제가 남아 있으면 새 아파트 완공 이후 무조건 입주해야 한다. 의무 거주 기간을 채우지 않으면 분양권을 팔 수 없다. 만약 실거주 의무를 지키지 않고 분양권을 팔거나 전세를 놓고 돈을 받아 매매대금을 내면 1년 이하의 징역 혹은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게다가 의무 기간 전에 이사를 나가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분양가 수준으로 집을 다시 팔아야 한다. 돈도 날리고 범법자까지 될 판국이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실거주 의무가 적용되는 아파트 단지는 전국 72개 단지, 4만7595가구로 이 중 3분의 1수준인 1만5000여 가구가 내년에 입주 예정이다. 정부 발표만 믿고 청약에 나섰다가 ‘정책 미아’로 졸지에 범법자가 될 상황에 처한 계약자들은 머리를 싸매고 있다.

전세보증금으로 잔금을 치르려던 이들은 급전이라도 찾아 나서야 할 상황이 됐다. 청약 당첨자들은 실거주 의무를 지키지 못할 바엔 벌금을 물겠다거나, 분양권을 팔고 본인이 해당 집에 2년간 세입자로 살면서 실거주 의무를 채우겠다는 편법까지 고심하고 있다.

 신용불량에 빠지게 될 우려도 있다. 입주 기간이 만료된 뒤 중도금 대출 기간이 연장되지 않으면 중도금에 대한 연체 이자를 부담해야 하는 데다 잔금 낼 때까지 지연 이자 등의 부담도 만만치 않아서다.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20일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실거주 의무 폐지 필요성을 강조하며 “국회에서 합리적 대안을 포함해 여러 가능성을 모색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토교통위는 연내 소위원회를 한 번 더 열어 개정안을 심사할 계획이라고 하지만, 법안 통과를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거대 야당의 협조 없이 법의 개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허둥지둥 이뤄진 정부의 ‘불완전 정책 판매’에 애꿎은 이들만 재산 피해와 처벌을 받게 됐다. 예상치 못한 시장 상황의 변동으로 인해 발행한 금융상품의 손실에 대해서는 ‘불완전 판매’란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며 피해 보상에 목소리를 높이는 정부가 자신의 ‘정책 불완전판매’에는 꿀 먹은 벙어리다. 정부의 전략 부재와 무능함에 나랏님의 말을 믿었던 이들은 정부 정책에 베팅한 ‘투기꾼’이란 세상의 비난 속 큰 교훈을 얻게 됐다. ‘나랏님을 믿지 마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