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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 테니 나가" 못한다…대법 "집주인 실거주 증명해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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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의 아파트 모습. 사진은 본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뉴스1]

수도권의 아파트 모습. 사진은 본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뉴스1]

집주인이 실거주를 이유로 임차인의 계약 갱신 요구를 거절하려면, 거주 의사에 대한 증명 책임을 져야 한다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4년 전, A씨는 자신이 소유한 서초구의 한 아파트를 전세로 내놨다. 자녀들이 제주도의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어 A씨는 제주에 살고 있었고, 남편은 일 때문에 서울의 또 다른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임차인으로 B씨 부부가 들어왔다. 전세금 6억 3000만원에 2년 계약이었다. 만료 석 달 전, B씨 부부는 계약갱신을 요구했으나 A씨는 안 된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사업이 어려워졌다. 국제학교도 더 못 보내게 됐고, 남편이 사는 아파트를 급매로 팔아 가족 모두 들어와 살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B씨 부부는 나가지 않았고 이에 A씨가 소송을 냈다.

2021년 6월부터 시행된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르면 임대인은 정당한 사유 없이 임차인의 계약갱신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게 원칙이다. 이 때문에 사실상 임대차 기간은 2+2년으로 늘어났다. 다만 임대인(직계존속·비속을 포함)이 실거주 하려는 경우엔 예외적으로 갱신을 거절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제가 들어와 살 것”이란 건 임대인의 마음 속에만 있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장래의 사정에 관한 것이어서 입증이 쉽지 않다. 이는 재판에서도 쟁점이 됐다. 임차인 B씨 부부는 “A씨가 실거주요건 조항을 악용해 거짓으로 부당하게 갱신 거절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남편·자녀와 들어올 거라던 A씨는 소 제기 후엔 아픈 노부모가 살 거라고 말을 바꿨다.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박세영 판사도 “A씨가 주장하는 실거주 계획이 진실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A씨는 제주 생활 청산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고, 급매로 처분할 거라던 남편 아파트는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올라와 있었다. 노부모 건강 상태도 당장 서울로 이주해야 할 정도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박 판사는 그럼에도 집주인의 손을 들어줬다. “아파트를 다른 사람에게 임대하거나 매도하려 하는 등 실거주 계획과 명백하게 모순되는 행위를 한 사정을 찾을 수 없는 이상 실거주계획을 이유로 한 갱신거절은 적법하다”는 거다.

같은 법원 민사항소 12부(부장 김성곤)는 이런 1심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며 판결문에 아무 내용을 추가하지 않았는데, 이는 대법원에서 깨졌다. 지난 7일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A씨가 문제의 서초구 아파트에 거주할 거라는 이유로 B씨 부부의 갱신요구를 거절하려면 그에 대한 증명책임을 부담한다”면서 “집주인인 A씨가 실거주 의사가 가공된 것이 아니라 진정하다는 것을 통상적으로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주장·증명해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A씨의 주거 상황, 가족의 직장이나 학교 등 사회적 환경, 실거주 의사를 가지게 된 경위, 기존 주거지에서 이사오기 위한 준비의 유무 및 내용 등을 살펴본 결과 A씨의 실거주 의사라는 걸 수긍하기 어렵다고 보고, 사건을 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앞서 하급심에서 ‘의심스럽긴 해도, 명백한 모순이 없으면 임대인 승’이라고 본 것과 달리 대법원은 ‘의심스러워 통상적 수긍에 이르지 못하면 임차인 승’이라고 본 것이다.

대법원 공보연구관실은 이날 판결에 대해 “임대인의 실거주 의사를 어떻게 판단할 지를 두고 하급심에서 의견이 엇갈려 왔다”면서 “이번 판결은 실거주 의사 증명책임의 소재와 그 의사를 판단하는 방법을 최초로 명시적으로 설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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