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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93세 이신자, 실타래 뚝심으로 직조한 자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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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게 뭐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어쩌면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을지 모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신자 회고전(내년 2월 18일까지)은 이렇게 관람객을 놀라게 하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멋진 작업을 평생 해온 아티스트가 우리 곁에 있었다는 데 놀라고, 그런 그가 93세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게 됐다는 사실에 또 놀랍니다. 그리고 실을 재료로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숙연해집니다.

이신자(덕성여대 명예교수)는 국내 1세대 섬유예술가입니다. 1930년에 태어나 서울대 응용미술과를 나온 그는 홍익대에서 직물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밟았습니다. 1950년대는 자수가 더 인기였다는 데요, 그는 50년대 후반부터 자수와 염색의 틀을 벗어난 작업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쇠망에 염료를 묻혀 바탕을 칠하고 그 위에 천을 붙이거나 수를 놓은 식으로 작품 (‘노이로제’)을 만들었는데, 그게 1961년의 일입니다.

‘숲’, 1985, 모사, 157.5x181㎝, 서울공예박물관 소장. [사진 MMCA]

‘숲’, 1985, 모사, 157.5x181㎝, 서울공예박물관 소장. [사진 MMCA]

1970년대는 그의 태피스트리 작업이 본격화한 시기입니다. 어릴 적 할머니의 베틀에서 익힌 직조 과정을 토대로 그는 틀에 실을 엮어 짜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노랑과 빨강, 갈색 등 따뜻한 색감의 실을 엮어 완성한 ‘숲’(1972)은 말 그대로 햇살 가득한 숲의 풍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네, 물감과 붓 대신 면사·마사·모사 등 실로 그린 그림입니다.

이후에도 작업은 고향 울진 앞바다의 일출과 석양의 강렬한 빛을 표현한 ‘기구 Ι’(1985), 산의 능선을 추상 이미지로 표현한 ‘산의 정기’(1996) 등으로 이어집니다. 3년 넘게 들여 완성한 작품 ‘한강, 서울의 맥’(1990~1993)은 가로 길이 19m의 대작으로 ‘실로 그린 수묵화’의 위엄을 보여줍니다. 전시는 이렇게 그의 초기작부터 2000년대 작품까지 90여 점, 드로잉과 사진 등 자료 30여 점을 보여줍니다.

그를 만났을 때 물었습니다. “그림 솜씨가 뛰어나다고 유명했다는데, 왜 실로만 작업하셨습니까?”.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가 느끼는 것과 자연 풍경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재료가 실이었다.” 이어 “실이 물감이라고 생각하며 하고 싶은 대로 했다. 하다 보니 재미있는 작업이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남편 장운성 화백을 먼저 보낸 상실감을 작품으로 달래고, 4남매를 키우면서도 작업을 쉬지 않은 뚝심과 끈기, 자유로운 영혼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작가는 이 전시를 통해 평생 고이 간직해온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주고, 우리는 그를 통해 국내 섬유 미술사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게 됐습니다. 이번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물감으로 그린 그의 그림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