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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4도에도 도로 안 얼었다…이런 열선, 청담동엔 못 깐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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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눈만 내렸다 하면 설설 기어 다니던 곳인데 열선 까니까 잘 나가네요”
21일 오전 서울의 체감온도는 올겨울 최저치인 영하 22도까지 떨어졌다. 쌓인 눈으로 인한 빙판길 우려와 달리 유모(61)씨가 운전한 성동02번 마을버스는 가파른 큰매봉 구간을 매끄럽게 통과했다. 서울 성동구청이 지난 1일 평균 경사도 17%의 독서당로 59길(500m)에 도로 열선 설치를 완료했기 때문이다. 서울시에 최대 3cm 눈이 내린 19일 오후부터 가동한 열선 덕분에 도로는 평소 노면 상태를 유지했다. 10년째 이 구간을 운행한 유씨는 “응달진 산비탈이라 눈이 조금만 와도 금세 도로가 어는 위험한 구간”이라며 “지난해만 해도 눈이 많이 오면 운행을 아예 포기했는데 앞으론 한결 수월할 것 같다”고 말했다.

21일 오전 서울 성동구 큰매봉산 인근 구간을 지나는 성동02번 버스기사 유모(61)씨가 지난 1일 설치된 도로 열선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매년 눈 때문에 골치였는데 열선이 설치돼 운행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이영근 기자

21일 오전 서울 성동구 큰매봉산 인근 구간을 지나는 성동02번 버스기사 유모(61)씨가 지난 1일 설치된 도로 열선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매년 눈 때문에 골치였는데 열선이 설치돼 운행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이영근 기자

도로 열선이 최강 한파에 위력을 톡톡히 발휘하고 있다. 열선은 빙판길에서 차량과 보행자의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장치다. 도로 포장면 5~7㎝ 아래 매설된 발열체에서 나온 열이 지표면을 데우는 식으로 작동한다. 지표면 기준 영상 5~10도를 유지하면서 시간당 3~5㎝가량 눈을 녹인다. 온도·습도 센서가 묻혀 있어 눈·비가 오고 지표면 온도가 2도 이하로 내려갈 때 자동으로 작동한다.

효과가 입소문을 타면서 서울 자치구들도 경쟁적으로 열선을 깔고 있다. 서울시가 중앙일보에 제공한 ‘자치구별 도로 열선 현황’ 자료에 따르면, 21일 기준 총 419개, 65.96㎞ 길이의 열선이 설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5년간 설치한 열선은 2019년 14개에서 2020년 27개, 2021년 57개, 2022년 151개, 2023년 161개로 급증하는 추세다. 강남구가 56개로 가장 많은 열선을 깔았고, 구간 길이론 성동구가 6800m로 1위였다. 반면 영등포구·양천구 등 아직 열선이 없는 자치구도 있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전문가들은 “열선은 가장 위험한 살얼음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 방법”이라고 말한다. 녹은 눈이 재결빙되거나 안개나 서리로 발생하는 살얼음(블랙 아이스)은 운전자가 눈으로 인식하기 매우 어려워 ‘도로 위의 침묵의 살인자’로 불린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노면 결빙 교통사고는 모두 4609건으로 107명이 사망하고 772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결빙 교통사고의 76%가 12~1월에 집중됐고, 일반 도로에 비해 치사율도 약 1.5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밤새 내린 눈이 쌓인 20일 오전 택시 기사 양정모(52)씨는 “새벽 4시에 나왔는데 벌써 교통사고만 4건을 봤다”며 “내일은 더 춥다는데 블랙 아이스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살얼음 낀 달동네 골목에 진입하면 앞이 깜깜하다는 양씨는 “열선 구간을 마주치면 반가울 정도”라고 했다.

20일 오전 서울 중구 필동로 8길. 열선이 설치된 곳은 전날 내린 눈이 녹아 없어져 있다. 오삼권 기자

20일 오전 서울 중구 필동로 8길. 열선이 설치된 곳은 전날 내린 눈이 녹아 없어져 있다. 오삼권 기자

해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길을 오르내리느라 고통을 겪었던 고지대 주민들도 열선 덕분에 큰 시름을 덜었다. 지난해 10월 서울 중구청은 남산 비탈길이라 경사도가 22%에 육박하는 필동로 8길에 330m 길이 열선을 설치했다. 주민 정효원(37)씨는 “눈길에 넘어져서 2주 동안 병원에 다닌 적도 있었는데, 열선이 생긴 뒤로는 많이 편해져서 대만족”이라고 말했다.

반면 가파른 언덕이 즐비한 용산구 해방촌 주민 송모(42)씨는 20일 오전 집앞 3m 폭 이면도로에 염화칼슘을 뿌리는 등 제설 작업을 해야 했다. 송씨는 “어르신들이 근처에 많이 사는데 매년 미끄러져 크게 다치곤 한다”며 “여기도 열선이 깔리면 좋겠지만 차량이 적게 다녀 우선순위에서 밀릴 것 같다”고 말했다.

열선의 단점은 만만치 않은 설치비와 유지비다. 열선 평균 설치비가 100m당 약 1억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예산은 주로 재난관리기금과 특별조정교부금으로 충당한다. 강남구청에 따르면, 올해 강남구는 29개 열선이 새로 설치하는 데 총 34억3000만원을 썼다. 또 지난해 1~3월 열선 27개를 가동한 결과 6200만원의 전기요금이 나왔다. 서울시 도로관리과 관계자는 “예산이 제한된 만큼 경사지, 응달진 곳, 교통량 등을 기준으로 설치 장소를 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20일 서울 용산구 해방촌 인근 언덕. 전날 밤새 쌓인 눈이 아직 녹지 않아 보행자들은 얼어붙은 계단을 이용하거나 종종걸음으로 가파른 언덕을 내려왔다. 오삼권 기자

20일 서울 용산구 해방촌 인근 언덕. 전날 밤새 쌓인 눈이 아직 녹지 않아 보행자들은 얼어붙은 계단을 이용하거나 종종걸음으로 가파른 언덕을 내려왔다. 오삼권 기자

이 때문에 결빙 사고가 잦지만 도로 열선이 깔리지 않은 곳도 많다. 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분석시스템(TAAS)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8~2022년) 전국의 결빙 교통사고 다발지역은 총 56곳으로 나타났다. 반경 200m 이내에서 결빙 교통사고가 3건 이상 발생한 지역을 대상으로 한 조사다. 서울시에선 총 5곳(용산구·강북구·관악구·서초구·강남구)에서 사고가 자주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강남구 청담사거리 부근에선 3건의 사고가 일어나 중상자 1명·경상자 4명의 인명피해가 있었지만 열선은 깔리지 않았다. 취재진이 실제 사고가 난 곳을 방문한 결과, 해당 지역은 ▶급경사지 ▶응달진 곳 ▶교통량이 많은 곳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2018년 1월 대인 사고가 발생한 이면도로 앞 편의점 직원 이모(54)씨는 “20년째 이곳에서 사는데, 도로가 낡아서 그런지 특히 미끄럽다”며 “차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장면을 자주 본다”고 말했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간선도로는 시가 관리하는 곳이어서 열선을 설치할 수 없었다. 구가 관리하는 이면도로의 경우 추후 열선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21일 오전 옥수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초등학생들이 등교 중이다. 정문 앞에 직선 형태로 설치된 160m 길이 열선이 전날 내린 눈을 모두 녹여 학생들이 안전하게 등교할 수 있었다. 이영근 기자

21일 오전 옥수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초등학생들이 등교 중이다. 정문 앞에 직선 형태로 설치된 160m 길이 열선이 전날 내린 눈을 모두 녹여 학생들이 안전하게 등교할 수 있었다. 이영근 기자

최근에는 교통약자를 위한 보도 열선도 설치되고 있다. 경사진 곳의 버스정류장이나 초등학교 입구 횡단보도 등이 대상으로 서울시에는 총 11개가 깔려 있다. 성동구 옥수초등학교, 서초구 양재노인종합복지관 앞 버스정류장 등이 대표적이다. 21일 오전 옥수초등학교 정문 앞은 160m 길이의 열선 덕에 전날 내린 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의 등굣길을 바라다 준 이모(39)씨는 “지대가 높아 등하굣길이 다소 걱정됐는데 열선이 깔려 있어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장진환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연구위원은 “실제 고령자가 많은 일본 등 해외에서는 보도에 열선을 많이 설치하고 있다”며 “교통약자를 위한 열선 설치도 점차 늘려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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