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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석의 100년 산책

새해 되면 105세, 인생은 무엇을 남기고 가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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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나이 스물을 넘기면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가지고 갈 책이 없었다. 수많은 일본어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글로 쓴 책은 없을 것 같았다. 또 잊을 수 없는 고향을 떠나면 조국과 멀어질 것 같은 아쉬움도 있었다.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을 갖고 가기로 했다. 갖고 떠난 단 한 권의 책이다. 그립고 허전한 시간이 생기면 한두 편씩 읽었다. 방학이 되어, 고향에 다녀갈 때는 다른 일본어책과 함께 전당포에 맡겨 두곤 했다. 몇 권의 전문 서적이 늘어나면서 『님의 침묵』은 외로이 일본어책들 가운데 끼어 있었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언제 어디서 자취를 감추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가는 삶
당장 필요한 물건 몇 개만 추려

오래전 강원 양구에 가묘 마련
기념관에 내 모든 것 기증할 것

하느님의 사랑 믿은 스승 도산
함께한 모든 사람에 감사할 뿐

일본 유학 때 간직한 『님의 침묵』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일본 경찰이 수시로 찾아오곤 했기 때문에 몇 차례 숨겨 놓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도쿄에서 교토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도 일본 경찰이 찾아오곤 했다. 윤동주 시인은 그즈음에 잡혀가 해방을 보지 못하고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에는 『님의 침묵』을 본 기억이 없다. 물론 해방 전 일본서 귀국할 때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누군가가 읽어주고 있으려니 하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후 20년 세월이 흘렀다. 마흔 고개를 넘기면서 1년간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게 되었다. 그때는 한글로 된 책을 가지고 갈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한 권쯤은 하는 생각으로 출판사에서 갓 나온 내 책 『고독이라는 병』을 갖고 갔다. 한국인으로서의 나를 지키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시카고 대학에 머물렀을 때도 여행하는 기간에도 갖고 다녔다.

1962년 봄학기를 하버드대에서 보낼 때였다. 내 방을 찾아온 서울대 한우근 교수가 읽어 보고 싶으니까 빌려 달라고 했다. 하버드 옌칭 도서관에는 한국 책이 많이 있으나 내가 쓴 책이고 흥미롭기도 했던 것 같다. 미국에서는 유일한 처음 독자가 된 셈이다. 저녁때 갖고 갔는데, 다음 날, 새벽에 전화가 왔다. 뜻밖의 전화여서 눈을 비비면서 수화기를 들었다.

“나, 한우근이예요. 저녁때부터 지금까지 한잠도 못 잤어요”라는 것이다. 혹시 한국에서 걱정스러운 편지라도 왔는가 싶어서 “가정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했더니 “그놈의 『고독이라는 병』 때문에….  이제야 다 읽었어요”라는 것이다. 책을 빌려 가서 읽기 시작했는데 새벽 4시까지 다 읽고 전화를 한 것이다. 한우근 교수의 목소리는 약간 흥분해 있었고 나는 소리를 죽여가면서 웃었다. 그 당시는 국제전화도 미리 편지로 어느 날 몇 시에 전화할 테니까 대기하라고 약속하고 걸던 때였다. 한 교수 집에 어떤 불상사라도 있었는가 싶어 긴장했는데 안심했다.

내 책 『고독이라는 병』과 맺은 인연

단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 후에는 그 책이 어디로 갔는지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손가방 하나만 들고 안병욱·한우근 교수와 같이 유럽 여행을 했으니까, 있어도 갖고 떠날 사정이 아니었다. 하버드대 주변 어디에서 홀로 남아있을 『고독이라는 병』을 기억에 떠올려 본다.

또 5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모친과 아내가 세상을 떠나 경기도 파주에 있는 가정 묘지로 모셨다. 애들이 두 무덤 사이에 나를 위한 가묘(假墓)를 준비해 놓았다. 아흔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위해 예비했다. 나도 머지않아 마지막 갈 곳이기 때문에 묵인하고 지냈다.

그런데 강원도 양구의 유지들이 나와 안병욱 교수는 절친한 친구로 50년 동안 함께 일해왔는데 고향이 북한이라 갈 수 없으니까, 휴전선 가까이에 고향을 만들어 기념하자는 뜻을 모았다. 그때 안 교수는 병중이어서 서둘렀다. 그래서 안 교수는 1년 후에 양구로 가고, 신축한 기념관에는 안 교수와 나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안 교수를 위한 공간은 그의 유품으로 채워졌다. 나도 곧 가게 될 테니까 기념관을 위해서라도 구색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나에게는 살아있는 동안의 기념관이 된 셈이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나는 할 수 없이 모친과 아내의 유해를 양구로 옮겨야 했다. 내가 갈 종착지가 기념관 옆이었으니까, 자연히 먼저 준비했던 가묘는 무용지물이 되고 새로 장만한 가묘가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지난 연말 양구를 다녀온 나는 지금 사용하는 것 중에 꼭 필요한 물건만 남겨 놓고 추가로 기념관에 보내기로 했다. 곧 105세가 되니까. 미국과 일본에 갈 때는 더 소망스러운 삶을 위해 돌아올 목적으로 떠났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돌아올 길이 아니다. 여러 사람을 위한 기념관이니까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남겨 주고 떠나야 한다. 누구나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가야 하니까. 소유했던 것을 주고 가는 것이 인생이다.

살아서 명예, 죽어선 치욕 되기도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라는 속담이 있다. 명예는 남는다는 생각으로, 살아있을 때는 명예욕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 길에서는 내 존재 자체가 없어지니까, 나를 위했던 명예도 소멸한다. 남는 것이 있다면 ‘감사하다’라고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들과의 마음이다. 살아있을 때 자신의 명예를 위해 한 일은 사후에 명예보다 치욕이 되기도 한다. 갈 때는 명예에 대한 소유욕까지 버리고 ‘그동안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가 남을 뿐이다. 많은 사람을 위해 더 좋은 것을 남겨 주지 못해 죄송하다는 뜻을 남기고 간다.

나의 젊었을 때 은인이었던 도산과 인촌은 “하느님 저에게 맡겨주셨던 나라 사랑은 더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보호와 사랑을 믿으며 떠나겠습니다”라는 기도를 남겼다.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은 영원한 절대자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나게 되어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