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57명 숨진 '형제복지원' 국가 책임 첫 인정…“145억 배상하라”

중앙일보

입력

형제복지원 피해자 박종호(왼쪽), 이채식씨가 21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재판을 마친 후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형제복지원 피해자 박종호(왼쪽), 이채식씨가 21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재판을 마친 후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21일 서울중앙지법 452호 법정에선 연신 “감사합니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군부독재 시절 부랑자로 찍혀 불법 감금돼 인권을 유린당했던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은 이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지 36년 만인 이날 처음으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받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9부(부장판사 한정석)는 이날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하모씨 등 26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수용 기간 1년당 8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총 청구 액수인 203억원 가운데 72%인 145억8000만원을 인정했다. 판결이 확정되면 피해자들은 1인당 최소 8000만원에서 최대 11억 2000만원을 수령할 수 있다.

재판부는 “강제 수용된 기간 아주 어려운 시간을 보내신 원고분들께 먼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1975년 (부랑인 신고, 단속, 수용과 관련한) 내무부 훈령으로 원고들을 단속하고 강제 수용했는데 이 훈령은 법률유보·명확성·과잉 금지·적법절차·영장주의 원칙을 위반한 위헌·위법적 훈령”이라며 “이에 따라 강제 수용된 점도 위법한 조치”라며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정부 측의 “소멸시효가 이미 완성됐다”는 주장에 대해선 “이 사건은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에 해당하고, 그 법리에 따르면 장기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찰이 넘긴 수용자 하차 장면.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경찰이 넘긴 수용자 하차 장면.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이번 판결은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2021년 5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16건의 손해배상 소송 가운데 나온 첫 판단이다. 참사의 발단은 1975년 박정희 정부가 부랑자 단속을 위해 제정한 내무부 훈령 제410호였다. 육군 부사관이던 고(故) 박인근씨는 같은 해 이 훈령을 근거로 부산시와 ‘부랑인 수용 보호 위탁계약’을 체결한 뒤, 당초 장인으로부터 인수했던 부산시 소재 아동복지시설을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인 보호시설 ‘형제복지원’으로 탈바꿈했다.

이후 형제복지원은 군부독재가 계속된 1987년까지 시민들을 납치·감금한 뒤 구타, 학대, 강제 노역 등의 인권침해를 일삼았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암매장시켜 흔적 없이 처리했다. 시신 일부는 의과대학 해부실습용으로 팔아넘겼다. 경찰과 부산시 공무원도 뒷돈을 받고 시민들을 형제복지원에 끌고 가며 가담했다. 직업과 가족이 있는 이들이 강제 수용된 사례도 적지 않다. 1987년 원생 35명이 집단 탈출하면서 비로소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입소자는 총 3만8000여명, 이 가운데 폭력·고문 등으로 657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결국 박씨는 1987년 재판에 넘겨졌지만 고작 2년6개월의 징역만 선고됐다. 검찰이 특수감금·횡령 등의 혐의로만 박씨를 기소했고 대법원은 “정부 훈령에 따른 부랑자 수용이었다”며 특수감금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면서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던 것과 무관치 않은 결과였다.

문무일 검찰총장이 2018년 11월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을 만나 피해자들의 진술을 들으며 눈물을 닦고 있다. 임현동 기자

문무일 검찰총장이 2018년 11월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을 만나 피해자들의 진술을 들으며 눈물을 닦고 있다. 임현동 기자

이대로 묻힐 뻔했던 사건은 문재인 정부에서 다시 법정 위에 올랐다. 2018년 11월 문무일 검찰총장은 “위헌·위법인 정부 훈령을 적용해 특수감금 혐의를 무죄로 본 당시 판결은 잘못됐다”는 검찰개혁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대법원에 박씨 사건을 비상상고 했다. 비상상고란 확정판결을 대상으로 그 재판에 법령 위반이 있음을 이유로 인정되는 비상구제 절차다.

그러나 대법원은 2021년 3월 “비상상고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기각했다. 그러면서도 “과거사위가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활동을 재개할 수 있고, 규명된 진실에 따라 희생자, 피해자 및 유가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정부의 적절한 조치를 통해 피해자들의 아픔이 치유되어 사회 통합이 실현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지난해 8월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공식 인정했다.

피해자 이모씨는 선고 직후 기자회견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1987년에는 박종철 사건이 터졌고 2015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다뤘을 때는 세월호 사건이 있었다”면서 “그때도 잊혔는데 이번에도 또 잊히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국가에서 이렇게 인정을 해주니까 고맙다”고 했다. 이어 “최근 국가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 패소 시 항소한 바가 거의 없는 거로 안다”며 “이 판결에 대해 항소는 피해자들이 하면 모를까 국가에서는 안 했으면 좋겠다. 피해자들은 빨리 끝내고 싶어 한다”고 강조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