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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와 경기 사이 중심잡기...“내년, 각국 중앙은행 실력 드러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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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AFP=연합뉴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AFP=연합뉴스

‘인플레 파이터’로 나서 온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내년 금리 인하 시기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물가가 정점을 찍은 후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는 만큼 앞으로는 고강도 통화긴축의 여파로 경기가 나빠지거나 금융 불안이 심화할 가능성을 더 염두에 둘 수밖에 없을 거란 관측이 나온다.

21일 주요 외신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내년 연착륙이 쉽지 않을 거란 전망이 피벗(Pivotㆍ통화정책 전환) 기대를 키우는 요소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인베스코의 크리스티나 후퍼 글로벌마켓 수석 전략가는 내년 미 경제의 ‘평탄치 않은 착륙’(bumpy landing)을 예상하면서 “일부 기업, 특히 소규모 업체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내년 금리 인하를 시사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13일(이하 현지 시간) 기준금리를 연 5.25~5.5%로 3연속 동결한 직후 “(금리를 내리지 않고) 너무 오래 기다릴 경우의 리스크를 인지하고 있으며 실기하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Fed가 이르면 내년 3월부터 인하를 시작해 1%포인트까지 내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로이터=연합뉴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로이터=연합뉴스

유로지역(유로화 사용 20개국)과 영국도 내년 금리인하 대열에 동참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시장에서 유럽중앙은행(ECB)과 영란은행(BOE)이 내년 6월쯤 첫 금리 인하에 나설 거란 전망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내년 3월부터 5~6 차례 인하를 단행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는 그만큼 경기 침체 신호가 뚜렷해지고 있어서다. 올해 유로지역 성장률은 지난 1ㆍ2분기 모두 0.1%에 그쳤고 3분기에는 -0.1% 역성장했다. 유럽연합(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는 올해 EU와 유로지역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0.8%(9월 전망치)에서 0.6%로 내려 잡았다. 경기 동향을 보여주는 산업 생산도 지난해 말부터 1년째 하락세다. BOE는 올해 4분기 성장률이 0.1%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변수는 여전히 불안한 물가다. 11월 유로지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2021년 7월 이후 최저 수준인 2.4%(전년 동월 대비)까지 낮아졌다. 같은 기간 영국의 CPI 상승률도 시장 예상치를 크게 밑도는 3.9%로, 2년여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모닝스타의 마이클 필드 유럽 시장 전략가는 “ECB가 인플레이션이 확실하게 둔화되면 경기 침체를 피하는데 초점을 맞추면서 금리인하를 고려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ECB와 BOE는 “물가 상승 위험이 여전하다”며 금리 인하 논의에 공식적으로는 선을 긋고 있다.

유혜미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내년에는 금리 인하 시기와 폭, 피벗 전후 사람들의 기대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등을 통해 각국 중앙은행의 실력이 제대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0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2023년 하반기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설명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0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2023년 하반기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설명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한국은행의 경우 그간 기준금리를 올리기도, 내리기도 어려운 딜레마 상황이 계속됐다. 하지만 미국의 금리 인상 사이클이 종료되면 한은 입장에서 인상 압박 요인을 하나 덜 수 있다. 미국과의 금리 차 확대에 따른 외환시장의 불안요소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제 물가와 경기 사이에서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하게 되는 셈이다. 한은은 한국 경제가 내년 2.1% 성장해 올해(1.4%)보다는 나아질 것이라면서도 반도체 등 정보기술(IT) 경기가 부진할 경우 1.7% 수준에 그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경기 회복 국면에 찬물을 끼얹지 않기 위해선 적절한 금리 인하가 필요하다. 그러나 물가가 예상보다 더디게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그간 전기ㆍ가스요금 인상 폭 제한과 유류세 인하 등으로 누적된 비용인상 압력이 내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 고인플레이션을 겪은 후 물가가 둔화하는 시기에는 기대인플레이션이 느리게 떨어진다는 점 등이 물가 목표 2% 달성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유혜미 교수는 “지금까지는 물가를 잡는다는 목표 하나만 보고 달려왔다면 이제는 물가와 경기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가 중요한 시점”이라며 “경기만 보고 섣불리 금리를 내렸다가 물가가 다시 튀어 올라 결국 2% 도달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 20일 물가 점검 설명회에서 이런 점을 거론하며 “인플레이션을 목표 수준으로 되돌리기 위한 마지막 걸음, ‘라스트 마일(last mileㆍ마라톤에서 목표 지점까지의 최종 구간)’은 지금까지보다 쉽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도 시장은 현재 3%대인 물가가 2%에 도달하기 쉽지 않은 만큼 경기 회복에 더 무게를 둬 조기 금리 인하에 나설 수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등 기대를 꺾지 않고 있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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