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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가장 비싼 '생존 작가' 호크니 "아이패드가 이 시대의 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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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비거 앤 클로저' 전시장에 선 데이비드 호크니.photo by Justin Sutcliffe. [라이트룸 서울]

런던 '비거 앤 클로저' 전시장에 선 데이비드 호크니.photo by Justin Sutcliffe. [라이트룸 서울]

데이비드 호크니 미디어 아트 전시 중 한 장면.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데이비드 호크니 미디어 아트 전시 중 한 장면.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림이야말로 저의 천직이라고 생각하면서 60년 동안 계속 그렸습니다." 

사방 벽면과 바닥까지 스크린으로 변신한 전시장에 '세계에서 가장 비싼 생존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86)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전시장엔 호크니의 그림 속 초록 나무들이 영화처럼 펼쳐지는가 하면, 공간은 다시 연필로 그린 흑백 드로잉으로 변신한다. 마치 관람객이 호크니의 스케치북과 캔버스 속으로 들어간 듯하다.

'현대 미술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 인터뷰 #"내 작업 새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서울 고덕동 라이트룸 서울에서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 '데이비드 호크니: 비거 앤 클로저(Bigger & Closer)'가 열리고 있다. 지난 2월 런던에서 시작했을 때부터 호크니가 직접 참여했다고 알려지며 화제를 모은 전시다. 서울 전시는 런던의 바통을 이은 것으로, 가로 18.5m, 세로 26m, 높이 12m 규모의 공간 규모도 런던과 똑같다.

이것은 전시일까, 영화일까. 전시장엔 27대의 프로젝터와 1500여 개의 스피커가 설치됐다. 사방을 둘러싼 스크린을 통해 움직이는 작품 이미지를 보여주는 '몰입형(이머시브) 전시'다. 그러나 기존 몰입형 전시처럼 작가의 그림으로만 스크린을 채우지도 않았다. 그림과 더불어 기록 사진, 영상,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50분 간 호크니의 작업 세계를 보여준다. 어떤 면에선 입체 영상으로 풀어낸 다큐멘터리에 가까워 보인다.

지난 2월 런던에서 작품을 선보이자 현지 반응은 엇갈렸다. "그의 가장 야심 찬 예술 전시"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호크니가 바보 같은 유행에 자기 명성을 빌려줬다"고 본 비평가도 있었다.

평생 그림을 그려오며 '현대예술의 거장'이라는 호칭까지 얻은 그가 이 작업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2010년 발빠르게 시작한 아이패드 드로잉에 이은 새로운 매체 실험일까. 많은 시각적 자극이 쏟아지는 시대에 60년을 '회화'에 바친 그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본지가 호크니를 단독으로 서면 인터뷰했다. 답변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가 보내준 글엔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자연에 경탄을 보내면서도 새로운 기술에 열려 있는, '탐구심 가득한 사람' 호크니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데비이드 호크니는 그림을 그릴 때 정장을 입는다고 했다.photo by Justin Sutcliffe [라이트룸 서울].

데비이드 호크니는 그림을 그릴 때 정장을 입는다고 했다.photo by Justin Sutcliffe [라이트룸 서울].

데이비드 호크니는 '비거 앤 클로저' 전 제작 과정에 참여했다. photo by Justin Sutcliffe[라이트룸 서울]

데이비드 호크니는 '비거 앤 클로저' 전 제작 과정에 참여했다. photo by Justin Sutcliffe[라이트룸 서울]

4년 전 몰입형 전시 제작 제안을 받고 흔쾌히 수락했다고. 
기술을 융합한 아이디어로 내 작업을 완전히 새롭게 보여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난 100년 동안 영화는 사람들을 극장으로 끌어냈지만, 이제 사람들은 소파에 앉아 큰 스크린으로 영화를 본다. 그런데 내 것은 소파에서 볼 수 없고 현장으로 직접 가야 한다. 무엇보다 이게 연극과 영화, 미술 등 모두에 해당한다는 게 가장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반 고흐, 구스타프 클림트 등 고전 거장의 작품을 활용해 만든 몰입형 전시랑은 좀 다른 것 같다. 
그들은 지금 여기 없고 나는 살아 있다는 게 가장 다른 점이다. 나는 각 장의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 중간 애니메이션 부분까지 전 과정을 다 지켜봤다. 직접 내레이션을 녹음하고, 음악도 골랐다. 반 고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혹평도 있었는데. 
"그런 말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건 내가 이 작품을 매우 맘에 들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과 기억으로 본다" 

1980년 데이비드 호크니가 작업한 오페라 무대를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준다. [뉴시스]

1980년 데이비드 호크니가 작업한 오페라 무대를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준다. [뉴시스]

라이트룸 서울에서 '데비이드 호크니:비거 앤 클로저'를 보고 있는 관람객.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라이트룸 서울에서 '데비이드 호크니:비거 앤 클로저'를 보고 있는 관람객.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 세계를 몰입형 전시로 보여주는 '비거 앤 클로저'. [뉴시스]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 세계를 몰입형 전시로 보여주는 '비거 앤 클로저'. [뉴시스]

작품은 '원근법 수업', '호크니, 무대를 그리다', '도로와 보도', '카메라로 그린 드로잉', '수영장', '가까이서 바라보기' 등 6개 주제로 나눠 그의 작업 세계를 소개한다. '카메라로 그린 드로잉'에서는 사진 콜라주 작업을 어떻게 하게 됐는지도 설명한다. 이 중에서도 '원근법 수업'은 '수업'이라는 제목 그대로 호크니가 직접 나선 심도 깊은 미술이론 강의를 방불케한다.

‘원근법(perspective)' 부분을 특히 강조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로 항상 원근법에 푹 빠져 있었다. 사람들은 카메라를 통해 보는 것이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카메라가 아니다. 우리는 마음과 기억으로 본다. 제가 작품에서 설명한 것처럼, 카메라는 기하학적으로 사물을 인식하지만, 우리는 심리적으로 사물을 본다. 이해하기 쉬운 말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얘기다. 

호크니는 "나는 사람들이 사물을 자세히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가끔 놀란다"며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보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번 작품을 통해 조금 더 다르게 볼 수 있기를 제안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호크니, 무대를 그리다'에선 그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다른 면모도 보여준다. '무대 디자이너' 호크니를 소개한 대목이다. 호크니는 1978년 '마술피리', 1987년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매우 많은 오페라 무대 작업을 했다.

오페라 무대 작업을 소개하며 애니메이션까지 동원했다. 
무대 미술은 내게 주어진 더 넓은 무대이자 큰 캔버스였다. 나는 항상 오페라를 좋아하고 무대 디자인하는 것을 사랑했지만 무대 세트를 전시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이번이야말로 그걸 보여줄 완벽한 기회였다.
1980년대에 사진 콜라주 작업을 했을 정도로 사진에 대한 열정도 남다른데.  
내 책 『명화의 비밀(Secret Knowledge)』에 쓴 것처럼 미술사의 위대한 화가들이 거울과 렌즈를 사용해 어떻게 그림을 그렸는지 파헤쳤다. 원근법과 명암법에 대한 내 연구였다. 나 역시 그 전통을 따르고 있다. 다만 나는 르네상스 화가들보다는 사진의 한계(카메라가 시야를 넓히는 대신에 더욱 고정시키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내 폴라로이드 사진은 그 고정된 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였고, 나는 그것들이 여전히 좋아 보인다고 생각한다. 
2010년부터 아이패드 드로잉을 해오고 있다. 
나는 항상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있었다. 디지털 기술은 실리콘이나 플라스틱 같은 재료다. 아이패드 역시 내가 써오던 붓과 연필과 같은 도구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기술은 우리 삶을 더 풍요롭고 크고 대담하게 만들 수 있게 해준다. 나는 관객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디지털 기술이 열어 놓은 가능성과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작품에서 “그림이야말로 나의 천직이라고 생각하면서 60년 동안 계속했다”고 했다. 미디어 환경이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데 그 생각은 변함 없나.  
앞으로도 회화의 자리는 변치 않을 것이다. 예전부터 사람들은 항상 회화의 종말을 얘기해왔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흥미로운 아티스트 중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화가들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회화를 통해 아름다움과 색채,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는 것을 사랑하며,회화는 그것을 포착하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다.
[예술과 기술의 융합 전시로 선보인 몰입형 전시 '데비이드 호크니:비거 앤 클로저' 전시장. [뉴시스]

[예술과 기술의 융합 전시로 선보인 몰입형 전시 '데비이드 호크니:비거 앤 클로저' 전시장. [뉴시스]

당신은 그림을 통해 자연에 대한 경이감을 표현해왔다. 자연은 언제부터 당신에게 중요한 주제였나. 
영국 요크셔에서 자란 어린 시절부터 늘 자연을 그리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자연은 절대로 지루할 틈이 없고, 끝없이 매혹적이다. 나는 다양한 풍경을 사랑해왔다. 내가 자란 요크셔의 풍경도, 지금 살고 있는 노르망디의 풍경도 사랑한다.
당신은 화가이면서 멋쟁이로도 유명하다. 얼마 전 "그림을 그릴 때도 정장을 입는다"는 기사를 봤다. 패션에 이토록 신경 쓰는 이유는. 
우리 모두 예쁘고 멋진 것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나? 오늘날 패션은 너무 지루해졌다. 운동복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스타일이 특히 부족해졌다. 내게 패션은 그림이나 포토 콜라주와 마찬가지로 시각적 세계를 탐험하는 또 다른 팔레트다.
요즘도 계속 작업하고 있나.
지금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동안 다른 작업에 빠져 있다가 돌아오니 너무 좋다. 난 새로운 시도를 즐기지만 항상 그림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림은 몇 천 년 동안 지속된 기술이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쓸 때 ‘삶을 사랑하라(Love Life)’라고 적는 것으로 유명하다. 당신이 삶을 사랑하는 방법은.  
나는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다. 현재를 살아갈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자연, 그리고 당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아트스트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을 물었다. 그는 "중요한 것은 호기심이다. 내 호기심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며 "이 작품 역시 내게 더 많은 아이디어를 주었다"고 답했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는 누구?

라이트룸 런던 전시장에서 포즈를 취한 데이비드 호크니. photo by Justin Sutcliffe. [라이트룸 서울]

라이트룸 런던 전시장에서 포즈를 취한 데이비드 호크니. photo by Justin Sutcliffe. [라이트룸 서울]

호크니는 1937년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난 화가이자 사진가이며 무대 디자이너다. 영국 왕립예술학교(RCA) 출신으로 전통적인 예술 교육을 받았지만, 회화뿐 아니라 사진, 판화, 삽화, 무대 디자인의 장르를 넘나들며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패드 등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예술 세계를 확장해왔다.

그는 또 세계에서 비싸게 작품이 팔리는 현대 미술가 중 한 명이다. 2018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예술가의 초상(두 인물이 있는 수영장)'(1972)가 약 9030만 달러(당시 환율 한화 1019억원)에 판매돼 당시 살아 있는 예술가의 작품 중 가장 비싼 작품으로 기록됐다. 이 기록은 2019년 제프 쿤스의 스테인리스 조각 ‘래빗(토끼)’이 1082억5000만원(9107만5000달러)에 낙찰되며 깨졌지만, 현재 전 세계엔 그의 아이패드 그림 한 점이라도 소장하기를 열망하는 미술품 수집가들이 적잖다. 10개의 에디션으로 나온 그의 대형 아이패드 회화도 국내에선 1점에 약 10억원 내외로 거래된다.

한편 그의 80세 생일을 맞아 2017년부터 시작한 대규모 회고전은 영국 테이트미술관, 프랑스 퐁피두 센터,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을 순회하며 100만 명을 끌어모았다.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에서 열린 국내 전시도 4개월 동안 3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모았다.

그의 캔버스엔 자연과 사람, 그리고 시간을 보고 느끼는 작가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6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옮긴 뒤 강렬한 빛과 선명한 색상이 담긴 수영장 시리즈를 그렸고, 70년대까지 미국의 자연을 캔버스에 담았다. 친구, 연인, 친척들을 모델로 해서 인물의 특징을 잡아 그린 초상화를 그렸다. 성적 소수자로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감추지 않고 성과 사랑에 대한 주제를 과감하게 파고든 점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고향 요크셔를 자주 방문해 자연 풍광을 유화와 수채화로 그렸다.

그의 그림은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흔들며, 강렬하면서도 매혹적인 색감이 특징이다. 최열 평론가는 식지 않는 호크니의 인기를 '회화의 힘'으로 풀이한 바 있다. 그는 "호크니는 회화의 감동을 새로운 시대, 새로운 관점으로 전하고 있다. 특히 원근·기억·공간·자연에 대한 천재적인 해석과 열렬한 탐구 정신이 감동을 자아낸다"고 평가했다.

한편 '데이비드 호크니:비거 앤 클로저'는 국내 (주)에트나컴퍼니가 라이트룸 런던과 국내 독점 콘텐츠 IP 계약을 체결하고,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이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에트나컴퍼니는 갤러리 현대의 도형태 대표와 글로벌 패션테크 컴퍼니 알타바 그룹의 구준회 대표가 함께 설립한 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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