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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진료의 없어 응급실 뺑뺑이, 의대 증원으로 해결 안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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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9호 28면

러브에이징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나치 독일의 최고 선전가였던 요제프 괴벨스(1897~1945)의 대표적인 어록이다. 24세에 하이델베르그대학에서 문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당시 나치당의 제일가는 인텔리였다. 히틀러도 괴벨스 박사로 부르며 존중을 표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선전(propaganda)의 가장 큰 적은 지식인주의”라고 생각하는 반(反)지성주의자였다. ‘인간의 본성은 진실을 믿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는 진리를 꿰뚫어 본 것이다.

국민계몽선전부 장관 괴벨스는 선전을 일종의 예술 작업으로 생각했으며, 선전원은 민중 심리 예술가로 봤다. 대중의 열정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이성은 필요 없고, 감성과 본능에 호소해야 한다는 철학을 현실에서 주도면밀하게 구현했다. 히틀러 우상화와 나치 정책에 대한 선전 방법은 국민의 열광적 지지로 나타났다. 실제 히틀러는 1934년 선거에서 유권자 95.7%의 참여율과 88.1%의 찬성표로 독일 최초의 총통(대통령과 수상을 겸임, Fuhrer)으로 취임했다. 불행히도 그의 선동에 홀렸던 독일인들은 600만 유대인 학살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광기 어린 흑역사에 동참한 국민으로 전락했다.

괴벨스는 반유대주의 선전과 나치의 악행을 정당화시킨 악마적 존재다. 하지만 그가 선전·선동에 사용했던 방법은 지금도 전 세계 정치권과 언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첨단 과학의 시대를 누리는 현대인의 신경계는 이성적 생각을 하는 대뇌와 감성과 본능을 관장하는 뇌 부위가 공존한다. 대뇌는 사피엔스가 문명을 발전시켜 슬기로운 존재로 우뚝 서게 한 일등공신이다. 태곳적부터 생존 과정에서 진화한 본능과 감성은 뇌 깊숙한 신경세포에 존재한다.

이성과 감성과 본능이 조화를 이루며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뇌세포가, 필요한 만큼만 활성화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위기와 갈등은 최적의 해결책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간결한 명제를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다.

한국 의사 기소율 선진국의 50~100배

일단 대뇌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 뒤 합리적 판단을 내리다보니 시간이 꽤 소요된다. 반면 본능과 감정을 좌우하는 뇌세포는 찰나에 강하게 반응한다. 또 이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려면 출생 후 장기간 지난한 학습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도 ‘생각 따로, 행동 따로’인 게 인간이다. 자제력 있던 식자가 순간적 충동을 못 이겨 평생 후회할 잘못을 저지르는 식이다.  대중을 선동하려면 이성은 무시하고 감성과 본능을 자극하라는 주장은 사피엔스의 뇌 기능을 제대로 분석한 이성적 판단인 셈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괴벨스는 대중을 가장 빨리 효과적으로 단합시키는 수단으로 증오(憎惡·Hate)를 꼽았다. 증오는 무작정 존재 자체가 싫은 감정인데 개인보다 집단이 대상일 때 전염성이 강하다〈표 참조〉. 불행히도 증오는 단순하고 극단적인 격렬한 감정이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가 쉽다.

21세기 선진국 정치인들도 증오를 활용해 광적인 지지층을 만든다. 트럼프는 증오 정치를 활용해 미국의 45대 대통령이 됐다. 사피엔스의 본성은 괴벨스가 활동하던 시대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인들도 반세기 가깝게 지역 간 증오심을 부추겨 콘크리트 지지층을 확보해 왔다. 상대방에 대해 그쪽, 저쪽 혹은 1찍, 2찍 하는 식으로 증오를 표현한다. 지역뿐 아니라 특정 사안과 집단에 대해서도 유권자의 증오심을 이용한다. 국민의 건강이 달린 의료 문제도 마찬가지다. 언론 역시 의사집단에 대해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돈벌이에 급급하다’며 증오심을 부추긴다. 과연 그런 걸까.

우선 국민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는 중환자와 응급 상황을 진료하는 필수 진료과 의사다. 이들은 초대형병원 명의도 휴일이나 저녁을 반납하고 병원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일과 삶의 균형은 다른 세상 이야기다. 심지어 응급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는 의사 중에서도 가장 수명이 짧았다(‘Medical specialties and life expectancy’, Life Style Medicine, 2021).

게다가 한국 의사의(주로 필수과 전공) 형사 소송 기소율은 영국, 독일, 일본 등 선진국의 50~100배다(‘의료행위 형벌화 현황과 시사점’, 2022). 반면 인구 10만명당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은 한국 42명으로 OECD 38개국 평균 73명보다 훨씬 낮다. 수입 측면에서도 정부는 필수진료에 대한 원가보존율을 70~80%로 제한한 상황이다(진료영역별 원가 보존율,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필수진료 원가보존율 70~80%로 제한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의대 졸업생들의 필수진료과 기피가 이상한 게 아니라 지원하는 새내기 의사들의 속내를 알고 싶다. 최근에는 의대 수석 졸업자가 전공의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피부 미용을 배우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물론 정치권과 관료, 정치 의사, 언론 등 그 누구도 심화하는 필수의료 문제에 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보다는 의사집단을 응급실 뺑뺑이와 의료취약지역 문제를 초래한 원인인 양 비난하면서 10년 이후에나 현장에 배출될 의대 증원만 강조하고 있다. 결과는 모양새 빠지게 의대 지원 재수생 증가를 기대하는 입시 관련 업종 주가 상승으로 나타난다. 반면 의대 증원에 가장 우려를 표하는 집단은 이공계 인재들의 의대 유출로 미래의 유망 산업 분야 인력이 감소할 것을 우려하는 과학계다.

한국 의료계의 미래는 정치권과 국민 정서가 합쳐져 나타날 것이다. 어떤 결과라도 놀랄 일은 아니며 어차피 차세대 몫이다. 문득 저승의 괴벨스라면 한국의 침몰하는 필수의료 분야 해결책에 대한 정치권과 언론의 선전 방식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진다.

황세희 연세암병원 암지식정보센터 진료교수.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인턴·레지던트·전임의 과정을 수료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로 활동했으며 2010년부터 12년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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