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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집단사고의 오류가 부른 참사, 발상의 전환 필요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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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부산 엑스포 참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는 국민에겐 실망과 충격을, 나라밖엔 국격의 실추라는 망신살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더 참담한 건 투표 당일까지도 판세를 오판하고 역전 드라마를 믿은 ‘정보의 실패’와, 할 수 있다는 희망 고문으로 국민과 여론을 호도하며 국정운영의 미숙과 무능을 드러낸 점이다. “윤석열 정부가 집단 편견과 확증편향에 빠졌고, 이 때문에 국민도 속았다”(The Diplomat)는 외신 보도가 과장이 아니다.

정부는 엑스포 유치를 위해 대통령과 총리·장관·기업 총수 등이 지구를 495바퀴(1989만1579㎞) 돌았고, 182개 국가의 대표급 인사 3472명을 만났다고 밝혔다. 국가 예산만 5744억원이 들었다. 국가적 역량과 에너지를 모두 갈아 넣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받아든 성적표가 29표(총 165개국 투표)다. 열세로 판단, 사실상 중도 포기하다시피 한 이탈리아(로마 17표)보다 12표 더 얻었을 뿐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집념·의욕 앞서 정세 잘못 판단
대통령 사과…물러난 참모 없어
냉철한 판단과 전략적 선택 절실
전시 행사보다 퍼스트 무버 돼야

윤 대통령은 “모든 것은 저의 부족 탓”이라고 사과했다. 기업 총수들을 이끌고 “Busan is beginning(부산은 다시 시작한다)”을 외쳤다. 부산시도 2035 엑스포 재도전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자”고 해서 모든 문제가 눈 녹듯 사라지고 뒤죽박죽 난맥상을 보인 국정 시스템이 제자리를 잡아갈 수 있을까.

“대통령 유엔 방문이 판도 바꿔” 주장

2030년 엑스포 개최를 위해 뛰었던 한국 대표팀이 지난달 28일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 1차 투표에서 부산이 탈락한 것으로 드러나자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사진 국무총리실]

2030년 엑스포 개최를 위해 뛰었던 한국 대표팀이 지난달 28일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 1차 투표에서 부산이 탈락한 것으로 드러나자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사진 국무총리실]

한국이 엑스포 유치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지난해 7월, 사우디아라비아는 대세론을 굳힌 상태였다. 사우디 실권자 MBS(무함마드 빈살만)는 한 손엔 두둑한 오일 머니를, 다른 한 손엔 ‘비전 2030’이란 청사진을 들고 유치전을 진두지휘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 이어 중국·이스라엘·튀르키예 등이 줄줄이 공개 지지 선언을 했다. 특히 프랑스가 유럽연합(EU)의 일원인 이탈리아를 외면하고 사우디의 손을 들어주면서 대세가 기울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후발 주자인 한국 정부는 올해 들어 “엑스포 판도가 바뀌고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지난 9월 윤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이 분수령이었다. 장성민 특사 겸 대통령실 미래전략기획관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윤 대통령이 47개국 정상을 만났고 상당수 중립 성향 국가들이 부산 지지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나타냈다”며 “엑스포 유치전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 대통령이 육개장에 밥 한 숟갈 말아먹고 저녁 늦게까지 정상들과 만났다. 부산을 글로벌 자유무역항으로 성장시키려는 대통령의 열망과 신념이 엑스포 유치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낙관론을 폈다. 이후 “사우디와 박빙 승부”(박형준 부산시장)라거나 “어느 정도 따라왔다”(한덕수 총리), “2차에서는 이길 수 있다”(박진 외교부장관) 같은 장밋빛 전망이 이어졌다. 구두 지지나 외교 서한을 보내온 국가가 50개국 이상이라는 분석이 대통령실에 보고됐고, 결선투표에서 로마를 찍었던 표와 리야드 이탈표를 집중적으로 공략한다는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사우디가 3분의 2가 넘는 119표를 얻어 1차에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정보 전달의 왜곡이 판세 오판 불러

“정보를 객관적이고 신중하게 판단했다”(박진 장관)는 설명과 달리 현장 실무자들과 지휘부 사이엔 상당한 온도 차가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유치전에 관여한 정부·기업 실무자들 사이엔 “열세라고 판단한 현장 보고서가 위로 올라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라거나 “제대로 뛰어보지도 않고 비관적 보고를 한다는 질책이 떨어지니, 좀 더 노력하면 상대국이 부산을 지지할 의향이 있는 것처럼 여지를 두고 보고서를 쓰게 된다”는 볼멘 얘기가 나왔다. 정보 전달의 왜곡이 판세 오판을 불렀다는 지적이다.

엑스포 유치위와 산자부·외교부·국정원 등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특히 해외 정보망을 통한 냉철한 정세 분석을 해야 했을 국정원이 유치전이 한창일 때 지휘부 간 알력 다툼으로 분란에 휩싸였다는 건 뼈아픈 대목이다. 일각에선 대통령실에 설치된 부산 엑스포 유치 특임기구의 운영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부산 엑스포 유치를 국정과제로 선정하고 대통령실에 미래전략기획관실을 신설, 장성민 전 의원을 기획관에 임명했다. (현재는 대기발령 상태다.) 장 전 기획관은 대통령 특사를 겸하면서 아프리카와 중남미 카리브 연안국 등 “100개 이상의 국가”를 방문했다. 전략을 짜고 정보를 수집·평가하고 대통령 보고까지 하게 되면서 사실상의 컨트롤타워처럼 인식됐다. 오히려 실질적 컨트롤타워가 돼야 할 유치위 사무총장(윤상직 전 산자부장관)이 로펌 근무를 이유로 비상근으로 일해 온 것과 대비된다.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우디 지지 국가의 지도부를 비밀리에 만나보면 공개 지지한 적 없다고 한다. 한국 지지 국가가 늘고 있다”(장 전 기획관)는 아프리카 출장 보고를 듣고 “엑스포 유치 현황과 전략을 국무위원들에게 설명하는 게 어떠냐”고 했을 만큼 힘을 실어줬다.

국제 행사 유치 실무에 밝은 외교가에선 “대통령실이 직접 실행 업무에 관여하면서 상황 평가와 보고의 균형추가 무너졌다”는 비판이 나왔다. 유치전 사정에 밝은 전직 대사는 “대통령 어젠다의 실행 동력을 만들고 체계적으로 모니터링하며 프로세스를 관리해야 할 수석급 비서실이 직접 교섭·출장·지휘·보고를 떠맡게 되면 정보를 왜곡하거나 잘못 평가하는 오류를 저지를 위험이 있다.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고 동시에 지휘도 하는 통로로 자리 잡으면 전권을 갖고 지휘해야 할 유치위나 다른 조직은 보조적 역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시스템 문제를 제기했다. 유럽 지역 공관장을 지낸 다른 전직 외교관도 “국제사회는 실리로 움직인다. 이번에 우리를 밀어주면 다음에 도와준다는 약속하에 철저히 기브 앤드 테이크(주고받기)로 움직이기 때문에 냉철한 상황 파악을 못 하면 쉽게 오판할 수 있다”며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과 실제 표가 오가는 건 전혀 다른 얘기”라고 말했다. 엑스포 유치에 대한 집념과 의욕이 앞서 객관적 정세 판단을 흐리게 하는 집단 사고의 오류에 빠진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우디와 빅딜 설로 혼선 빚어

엑스포 유치전 와중에 사우디와의 이면 합의 빅딜 설이 흘러나오면서 혼선을 빚은 것도 미스터리다. 윤 대통령은 투표 한 달을 앞둔 지난 10월 사우디를 국빈 방문, MBS와 정상회담을 갖고 건설·인프라 분야 협력 강화 등을 담은 한·사우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세일즈 외교의 일환이었다고는 하나, 표를 놓고 대결을 벌이다 별안간 국제사회에 잘못된 사인을 줄 수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내 재계에도 이면 합의설이 파다했다. 의도치 않은 오발탄이었다면 외교 전략의 부재이거나 컨트롤타워의 무능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외교적 자산으로 생각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이룰 수 있었다”(한 총리)며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를 외칠 게 아니라 구멍 난 국정 시스템부터 손봐야 한다.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했는데도 물러나는 참모 하나 없고, 책임 있는 인사들이 오히려 진급하거나 총선에 차출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서울올림픽 유치 당시 국회 문공위원장을 지낸 이영일 전 의원은 “과거엔 장관·수석이 자신이 대통령인 것처럼 뛰었다”며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서 대통령이 제대로 된 보좌를 받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2035 부산 엑스포는 가능할까

이번 실패의 이면엔 ‘중국 리스크’를 제대로 관리 못 한 측면도 크다. 2035년 엑스포 유치를 노리는 중국은 ‘2025 오사카-2030 부산’ 구도는 부담이다. 그래서 비동북아 국가인 사우디를 지지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슬람 같은 강력한 종교 연대나 지역협력 연대 같은 ‘뒷배’가 없는 한국은 한표 한표 쌓아가는 외교를 해야 하는데, 아프리카·중동·남미에 상당한 교두보를 확보한 중국과의 표 대결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부산의 재도전을 전략적인 틀에서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근래 외교무대에선 “한국이 출마하지 않는 데가 어딘지 알려달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지방자치단체들 간 국제대회 유치 경쟁, 유엔 등 국제기구의 선출직 출마가 남발되면서 피로감을 주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ILO(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에 출마해 참패했고,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 연임에 실패한 것도 이런 정서와 무관치 않다.

높아진 국격만큼 냉철하게 정세를 따져보고 전략적 선택을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엑스포 유치전에 관여했던 한 인사는 외국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K팝·K드라마 등 한국의 소프트 파워가 높아졌는데 왜 엑스포 같은 전시성 행사에 집착하느냐”며 “라스베이거스의 CES(소비자가전쇼)나 바르셀로나 MWC(모바일 월드 콩그레스)같이 한국의 발전한 IT기술과 독창성으로 미래지향적인 퍼스트 무버로 가는 게 낫지 않은가”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면 된다는 정신승리법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