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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승현의 시선

공영방송이 이상하다는 KBS의 개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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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개념 개그’가 그리웠던 걸까. 지난달 12일 부활한 KBS 개그콘서트(개콘) 시즌2를 보다가 ‘심쿵’했다. 3년 5개월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여전히 친숙한 ‘봉숭아 학당’에 나온 낯선 개그맨 때문이었다. 개그맨 신윤승이 날린 멘트는 이랬다. “아, 이상해, 이상해. KBS 공영방송 이상해.”

오랜만에 보는 무대 위의 도발! 그는 “인터넷 방송이 훨씬 재밌지, 요즘 누가 봐. 하지 말란 게 너무 많잖아”라고 객기를 이어갔다. 웃음 포인트는 단순했다. 사람들이 다 아는 상품 이름을 왜 공영방송에선 제대로 말하지 못하냐는 것. 새우깡을 새우과자라 부르고 상표 이름에 모자이크나 묵음처리하는 것에 정색하는 개그맨의 대사는 중간중간 묵음 처리가 됐다.

‘개콘’ 개그맨의 공영방송 저격
정치에 휘둘린 ‘묵음 방송’ 연상
성역 없는 개그 정신 구현되길

“새우도 돼, 깡도 돼, 심지어 깡새우도 돼. 그런데, 왜 새우(깡은 묵음~)이냐고!” 관객에게 ‘깡’이 안 들리지 않느냐 묻는 능청에 폭소가 터진다. 이어 “그니까 방송국도 바뀌어야 된다고. 왜 말을 못 하냐고, 왜 갤럭시(노트 묵음~)라고 얘기를 못 하냐고…”라고 외치다 진행팀에 끌려나갔다.

이 개그에 ‘개념’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건 필자가 택한 찬사다. 오랜만에 만난 개콘에서 공영방송의 현실을 풍자한 듯한 메타포를 만나니 반가웠다.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하지 말란 건 많고, 인터넷 방송보다 재미없는, 이상한 공영방송…. 이것은 현실인가 개그인가.

수차례 정권 교체 과정에서 KBS는 길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민의 방송이라는 공영성은 편향성의 동의어 정도로 치부되고 정치권의 지각 변동 뒤엔 으레 진영을 가르는 인사가 요동쳤다. 무보직 억대 연봉자가 곳곳에 포진한 방만 경영에 TV 수신료 강제 징수는 강도질이라는 비아냥까지 받는다. 반복되는 흑역사를 누구도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는 사이 ‘묵음 처리 방송’과 오버랩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새 정부에서도 유사한 갈등과 의심이 여전한 가운데 신윤승이 외친 개그는 개념 있는 깡이 아니고 무엇이랴.

문득 ‘개념 연예인’ 논란이 있었던 4년 전 사건도 떠오른다. 연예인들마저 진영으로 나뉘어 공방이 오가던 시절,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호 집회를 응원한 한 개그맨은 “개념 있다”는 추앙을 받았다. 같은 시기 개그우먼 김영희는 “조국 딸의 느낌”이라고 자기 기분을 묘사했다가 제대로 찍혔다. “무지함을 사과한다”고 했지만, 결국 팟캐스트를 접었다. 전체주의적 팬덤의 폭격은 맨정신으로 버텨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공교롭게 김영희는 부활한 개콘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최근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는 말이 있죠. X소리야”라는 글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키보드로 쓴 악플이 키보드로 두드려 맞는 것보다 아프다”며 “누군가에게 손가락질하기엔 우리 모두 완벽하지 않다. 한 번 사는 인생 굳이 애써서 나쁘게만 뾰족하게만 보지 말고 둥글게 좋게좋게 살자”고도 했다. 악플로 상처받은 다른 방송인을 위로하는 글이었는데, 4년 전 자신의 경험을 감정 이입했을 것이다. 김영희가 ‘탄핵’ 당할 당시 필자는 “대통령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도 풍자와 해학의 대상이 되어야 할 ‘개념 개그’를 구경이나 하겠느냐”는 요지의 칼럼을 썼다.

정권이 바뀌고 다시 돌아온 개콘의 신윤승이 KBS를 작심 저격한 것인지, 그냥 웃기려는 것인지, 이전 정부를 돌려 깐 것인지, 아니면 이번 정부에 삐딱한 경고를 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이제 시즌2의 한 달을 어렵게 보내고 있는 개콘에 괜한 정치적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다. 다만, 아무리 유치찬란한 개그라도 한심한 논리로 편 가르고 가짜뉴스로 이전투구나 하는 정치 현실보다는 훨씬 유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개콘과 개그맨들도 이젠 정치적 시선을 염려할 여유조차 없을 것이다. 신윤승의 말대로 인터넷 방송과 유튜브가 훨씬 재밌는 시대에, 레거시 미디어 플랫폼으로 전락한 방송사와 TV가 폼 잡는 꼴을 참아주는 시민이 있는가. 돌아온 개콘도 이미 뉴미디어의 문법에 점령당해 식민지 독립군 신세로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최근 대학교수들이 뽑았다는 올해의 사자성어 견리망의(見利忘義·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다)를 미디어 업계도 상기했으면 한다. ‘이상한’ 공영방송의 관계자들은 봉숭아학당을 보며 정치적 이로움보다 의로움을 되찾길 바란다. 앞으로의 개콘 무대엔 언제든 “대통령 이상해” “야당 대표 어이없어”하는 개그가 펼쳐졌으면 한다. 절대권력도 개그 앞에 얼굴은 붉힐지언정 화풀이는 안 하는 미덕이 되살아나길, 개그의 자유, 개그의 의(義)가 구현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