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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자들이 가져간 남편 사망퇴직금…"아내 것" 대법 판결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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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뉴스1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뉴스1

노사 협약으로 ‘직원 사망 시 퇴직금은 유족에게 준다’고 정했다면, 사망한 직원이 빚이 아무리 많았어도 퇴직금만큼은 채권자들이 건드릴 수 없는 유족의 재산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숨진 농협은행 직원 A씨의 아내가 남편 사망퇴직금을 달라며 농협은행 등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지난달 16일 아내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단체협약을 통해 사망퇴직금을 유족에게 지급하기로 정하였다면 수령권자인 유족은 상속인으로서가 아니라 위 규정에 따라 직접 사망퇴직금을 취득하는 것이므로, 사망퇴직금은 상속재산이 아니라 수령권자인 유족의 고유재산”이라고 했다.

사망퇴직금이 유족의 상속재산인지, 고유재산인지가 중요했던 이유는 사망한 A씨에게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속재산, 즉 유족이 망인으로부터 물려받는 재산으로 본다면 그 출발은 망인이기에 망인의 채권자들이 가져갈 수 있다. 반면 고유재산, 즉 망인을 거칠 필요 없이 애당초 유족의 것이라 본다면 이는 망인의 채권자들과는 무관한 돈이 된다.

상속재산이냐 고유재산이냐…6년 다툼 끝 대법원 “고유재산” 

 유족도 처음엔 상속재산이라 생각했다. A씨가 2012년 4월 숨진 후 아내는 법원에 한정승인 신청을 내며 상속재산 목록에 퇴직금을 포함했다. 한정승인이란 상속받을 재산 한도 내에서만 빚을 갚기로 하는 것이다. 10년 넘게 농협은행에 다녔던 A씨의 사망퇴직금은 세후 1억 868만원. 하지만 빚이 더 많았다. 다니던 농협은행에서 1억 500만원, 농협생명보험과 씨티은행에 각 6300만원씩을 빌렸었다.

한정승인이 받아들여지자, A씨의 전 직장이자 채권자인 농협은행은 사망퇴직금 1억 868만원 중 절반(5434만원)을 공탁해 2013년 12월 생명보험·씨티은행과 나눠 압류했다. 퇴직금과 임금은 근로자 생활보장을 위해 절반까지만 압류할 수 있다. 유족들로선 나머지 절반은 받나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농협은행은 2016년 6월 ‘한정상속 재산(퇴직금) 정리 예정 통보’라면서 ‘5434만원을 가져가라’고 했지만, 그 의미는 압류할 수 없는 퇴직금의 절반을 추가 변제금으로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단체협약 명시 조항 살펴야…“사망퇴직금은 가족 위한 것이기도” 

 남편 사망퇴직금을 한 푼도 못 받게 생긴 아내는 변호사를 찾았고 2017년 1월 소송이 시작됐다. 사건 대리를 맡았던 한용현 변호사는 “사망보험금의 경우 상속인의 고유재산이라는 판례가 대다수인데, 같은 법리를 사망퇴직금에도 적용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농협은행의 반대 주장도 거셌다. 사망퇴직금은 A씨의 생전 근로에 대한 대가로 주는 것이므로 유족들이 물려받을 수 있을 뿐인데 A씨가 빚이 많아 받을 게 없는 거라며 맞섰다. 소 제기 6년 뒤, 대법원은 사망퇴직금엔 생전 근로에 대한 대가로서의 성격도 있지만, 부양가족의 생활보장과 복리향상 등을 위한 급여로서의 성격도 있다면서 유족 손을 들어줬다.

다만 이 판결로 사망퇴직금=유족 고유재산 공식이 생긴 건 아니다. 농협은행과 노조의 단체협약엔 ‘사망으로 인한 퇴직자의 퇴직금은 근로기준법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유족에게 지급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노사 협약 자체의 결과물인 단체협약을 가급적 존중해야 한다”는 게 이번 대법원 판결의 취지다. 만약 단체협약에 이런 명시적 조항이 없거나, 근로자가 수령권자를 다른 이로 정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절반은 ‘부당이득금’으로, 절반은 ‘미지급 퇴직금’으로…이자도 각각

 결국 A씨의 채권자들은 퇴직금을 내놓게 됐다. 다만 대법원은 농협은행이 공탁해 세 회사가 나누어 가진 5434만원에 대해선 ‘부당이득금’으로, 농협은행이 가지고 있던 5434만원은 ‘미지급한 퇴직금’으로 봤다. 부당이득금에 대해선 민법상 지연손해금(연 5%)이 적용되나, 퇴직금에 대해선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지연손해금(연 20%)이 붙는다. 다만 2심은 A씨 사망 이후부터 연 20%가 적용하는 거로 계산했으나, 대법원은 사망 이후부터 2심 선고가 나기까지 6년간은 6%, 이후부터 20%로 계산했다. 농협은행 입장에선 사망퇴직금에 대해 다툴 필요가 있었단 걸 고려한 것이다. 대법원은 이 부분만 파기해 스스로 판단을 내렸다.

대법원 공보연구관실은 “단체협약에서 수령권자를 유족으로 정한 경우 사망퇴직금은 원칙적으로 상속재산이 아니라 해당 유족 재산이라는 법리를 최초로 명시한 판결”이라며 “다만 해당 유족의 고유재산이라도 퇴직금의 성질을 가지므로 그 지연손해금에 대해서는 근로기준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쟁점, 소멸시효와 최선순위 유족…한 마디에 수천 만원이 오갈 수도

이 사건에는 이외에도 ‘소멸시효’와 ‘최선순위 유족’에 대한 쟁점도 있었다. 각각 농협은행과 유족 측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더 많은 돈을 아끼거나 받을 수 있었던 포인트다.

A씨는 2012년 4월에 사망했고 유족이 소송을 낸 건 그로부터 4년 7개월 뒤인 2017년 1월이다. 부당이득금 반환채권 소멸시효는 10년이지만, 퇴직금 청구권 소멸시효는 3년이다. 부당이득금으로 보는 절반에 대해선 시효 문제가 없으나, 퇴직금에 대해선 시효가 지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16년 6월, 그리고 2017년 1월에 농협은행이 ‘한정상속 재산(퇴직금) 정리 예정 통보’를 보냄으로서 시효가 살아났다. 법원은 “(통보를 함으로써) 농협은행은 5434만원에 대해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한 것”이라 봤다. 만약 농협은행이 이런 통보를 하지 않았다면 시효가 완성돼 5434만원에 대해선 돌려주지 않아도 됐을 것인데 제 발등을 찍은 격이다.

이번 판결로 인정된 금액은 A씨의 사망퇴직금 전액(1억 868만원)이 아니라 7245만원이다. 민법상 상속인과 달리 근로기준법상 유족은 1인 단독수령이다. 원고 측은 주위적 청구로는 아내 1인에게 퇴직금 전액을 달라고 했고, 제2예비적 청구로 아내와 자식 둘에게 부당이득금을 돌려달라고 했다. 법원은 절반은 퇴직금으로 절반은 부당이득금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퇴직금 5434만원은 청구대로 아내 1인이 단독수령하도록 하되 부당이득금 5434만원에 대해선 자식 둘 몫은 인정할 수 없아(최선순위가 아니므로 유족으로 인정하지 않음) 아내 몫인 1/3만 준 것이다. 만약 제2예비적 청구도 ‘아내 1인에게’로 했다면 전액(1억 868만원)을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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