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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컴코인'도 터졌다…주인 9번 바뀐 '국민벤처'의 기구한 운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글과컴퓨터의 기구한 역사에 또 한 페이지가 추가됐다. 김상철 한컴 회장의 아들 김모씨가 100억원대 ‘코인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업무상 배임·횡령)로 지난 5일 구속되면서다. 한컴은 “현재 경영진과는 무관하다”며 오너 리스크에 선을 긋지만, 내부 직원들 사이에선 “9번의 오너 교체 끝에 안정을 찾나 했더니 요즘 다시 침통한 분위기”라는 자조섞인 말이 나온다.

경기 성남시 판교에 위치한 한글과컴퓨터 본사. 뉴스1

경기 성남시 판교에 위치한 한글과컴퓨터 본사. 뉴스1

파란만장 한컴의 굴곡진 33년

 한컴은 1990년 설립 이래 숱한 부침(浮沈)을 겪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오피스가 세계 워드프로세서 시장을 호령하던 1990년대 후반, 한컴은 국산 대항마 ‘아래아한글’로 국내 시장을 지켰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불법 복제와 외환위기 사태가 겹치며 1998년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당시 아래아한글 사용자 300만명 중 250만명 이상이 불법 복제판을 썼다.

1998년 6월 19일 서울 역삼동 벤처기업협회의 아래아한글 지키기 사용자 1만원내기 운동 성금 접수창구에서 한 네티즌이 성금을 낸 뒤 엄지손가락을 내보이고 있다. 중앙포토

1998년 6월 19일 서울 역삼동 벤처기업협회의 아래아한글 지키기 사용자 1만원내기 운동 성금 접수창구에서 한 네티즌이 성금을 낸 뒤 엄지손가락을 내보이고 있다. 중앙포토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MS에 한컴을 넘기려던 창업자 이찬진 사장은 아래아한글 살리기 운동본부(본부장 故이민화 전 메디슨 회장) 덕에 구사일생한다. 국내 대표 ‘벤처 1세대’였던 이민화 회장은 토종벤처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2000년 한컴을 인수하지만, 정작 메디슨이 부도가 나며 한컴은 주인 없는 신세로 2년을 보내게 된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한컴의 최대주주는 웨스트에비뉴에이전트(홍콩계 사모펀드)→티티엠→넥스젠캐피탈(아일랜드계 투자회사)→서울시스템으로 4번 바뀌었다. 그마저도 기존 최대주주가 보유지분 전량을 장내매각해 갑작스레 지분 1.57%짜리 최대주주가 되거나(티티엠), 경영 목적 없이 지분 8.62%만 사들여 최대주주에 등극하는 식(넥스젠캐피탈)이었다. 치열한 인수전이 아닌, 떠넘기기식 오너 교체가 거듭된 것이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프라임그룹 이후 사법리스크 끊이지 않아

 변곡점은 2003년 찾아왔다. 테크노마트·프라임저축은행 등으로 사세 확장을 꾀하던 프라임그룹이 경영 의지를 보이며 한컴을 인수한 것이다. 한 IT업계 인사는 “당시 부동산 개발업자라고 하면 위법한 일에 손대야 클 수 있었다. 한컴의 ‘국민 벤처’ 이미지를 원했을 것”이라고 기억했다. 한컴·사이버패스·동아건설 등을 차례로 인수한 프라임그룹은 이내 계열사 15개를 거느린 중견그룹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2005년 신도림 테크노마트 개장 당시 나온 프라임그룹의 TV CF. 관계사에 '한글과컴퓨터'가 써있다. 중앙포토

2005년 신도림 테크노마트 개장 당시 나온 프라임그룹의 TV CF. 관계사에 '한글과컴퓨터'가 써있다. 중앙포토

 하지만 봄은 길지 않았다. 2008년 ‘프라임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이 대대적으로 불거졌다. 각종 정·관계 로비 의혹과 부실 대출, 배임·횡령 의혹 등이 연달아 터졌다. 백종헌 회장은 퇴임 1년차였던 정상명 전 검찰총장을 변호인으로 선임하는 등 사법리스크 대응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그해 11월 구속 기소됐다. 한컴에도 위기가 닥쳤다. 백 회장의 동생 백종진 한컴 대표가 회삿돈 수십억 원을 프라임그룹 계열사 주식을 인수하는 데 쓴 혐의(횡령)로 그해 9월 백 회장보다 먼저 구속 기소된 것이다. 백종진 대표는 2010년 경제사범 가운데선 이례적으로 징역 5년과 추징금 29억원이 확정됐다.

지난 2008년 백종헌 프라임그룹 회장이 서울 마포구 서부지검에서 횡령 및 배임 혐의 등으로 소환조사를 받은 뒤 귀가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08년 백종헌 프라임그룹 회장이 서울 마포구 서부지검에서 횡령 및 배임 혐의 등으로 소환조사를 받은 뒤 귀가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너 부재 상태가 된 한컴은 2009년 삼보컴퓨터 컨소시엄(셀런)을 8번째 주인으로 맞는다. 그러나 한컴 인수를 위해 무리한 담보 대출 등을 감행했던 김영민 셀런 대표와 동생 김영익 한컴 대표가 1년도 안 돼 배임·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면서 한컴은 또다시 매물 처지가 된다. 현재의 오너 일가가 나타난 것이 이때다.

김상철 일가의 등장, 그리고 13년 만의 오너리스크

김상철 한컴 회장. 중앙포토

김상철 한컴 회장. 중앙포토

 각각 ‘M&A 전문가’ ‘미국 1세대 벤처사업가’로 알려져 있던 김상철 소프트포럼 회장과 김정실 캐피탈익스프레스 회장 부부는 2010년 9월 서울 도곡동 소프트포럼 사옥을 매각한 대금과 사재, 사모펀드 등을 끼워 670억원에 한컴을 인수했다. 김상철 체제에서 한컴은 마스크, 금 거래소, 노인요양원, 모빌리티 등 다분야 M&A를 통해 돈 되는 사업이라면 뭐든 과감히 뛰어드는 기업으로 변모했다. 매출은 2013년 685억원에서 2020년 4014억원까지 꾸준히 성장 곡선을 그렸다. 다만 최근 3년 실적은 2019~2020년에는 미치지 못한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10여 년간 한컴을 안정시킨 김 회장은 2020년 장녀 김연수에게 경영권 승계 작업을 시작했다. 이듬해 취임한 김연수 한컴 대표는 지난해 7월 1000억원에 한컴MDS·한컴로보틱스·한컴모빌리티 등 계열사 12개를 매각하며 자신만의 사업을 정돈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불거진 게 이번 ‘아로와나토큰 비자금 사태’다. 익명을 원한 복수의 법조계 및 IT업계 인사는 “김 회장이 승계 구도에서 밀려난 아들 김씨를 챙겨주려다 탈이 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검찰 관계자는 “경찰에서 사건이 송치되는 대로 김상철 회장의 연루 의혹 등도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컴 코인’이란 후광을 업고 2021년 발행된 아로와나토큰은 가상화폐 거래소 빗썸 상장 당일 50원이었던 시작가가 30분 만에 5만3000원대가 되는 등 1000배 이상이 뛰며 불법 시세조종 의혹을 받았다. 수사당국은 코인 브로커가 아로와나토큰 매도 차익으로 사들인 100억원대 비트코인, 이더리움, 미술 NFT 등이 회장 아들 김씨의 비자금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수원지법 성남지원 이도행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지난 5일 “증거 인멸의 염려와 도망할 염려가 있다”며 김씨와 아로와나테크 대표 정모씨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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