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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중국 차(茶)는 원래 우유의 몸종(酪奴)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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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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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차의 나라다. 요즘은 커피도 많이 마신다지만 그런데도 하루도 차를 마시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차가 일상화됐다. 중국인이 차를 마시는 이유를 우리는 대충 알고 있다. 기름진 음식을 차로 녹여내기 위해서라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 물에는 석회 성분이 있어 그대로 마시기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가 일상 음료가 됐다고 한다.

환경이 이러니 중국인들, 아주 오래전부터 차를 마셨을 것 같다. 차의 발상지인 데다 삼국지도 유비가 찻잎을 사는 것에서 시작하니 최소 2000년은 넘었을 것 같다.

중국에서는 심지어 아예 전설 시대부터 차를 마셨다고 말한다. 당나라 때 육우가 쓴 『차경(茶經)』에서는 차의 기원이 농사법을 알려준 신농씨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신농씨가 100가지 풀을 일일이 맛보는 과정에서 72가지 독초에 중독됐는데 찻잎을 먹고 말끔히 해독됐다는 것이다. 덧붙여 춘추전국시대 여러 인물이 차를 즐겨 마셨다고도 했다. 하지만 당시 특권층이나 도사 같은 사람들이 차를 마셨을지는 몰라도 아마 극소수에 그쳤을 것이다.

실제로 차가 퍼진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아서 8세기 당나라 무렵부터다. 이때도 차는 사대부들이 마셨고 일반인들에게 퍼진 것은 훨씬 나중이다. 이렇듯 중국에서 차가 퍼진 과정을 보면 알고 있던 상식과는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 때문에 차를 통해 중국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뜻밖에도 옛날 중국에서는 차를 우유 혹은 요구르트의 몸종이라고 했다. 한자로는 낙노(酪奴)다. 당나라 이전인 남북조시대 북위에서 불렀던 차의 별칭이다. 남제 출신 장군으로 북위에 투항한 왕숙이 유목민의 음료인 양젖에 익숙해지면서 차는 양젖의 노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낙양가람기』라는 문헌에 나온다.

심지어 4세기 남경을 수도로 한 동진에서는 차를 재앙의 물이라는 뜻인 수액(水厄)이라고 했다. 남조시대 문헌 『세설신어』에 보인다. 차가 왜 이렇게 천대를 받았을까?

당나라 이전의 남북조 시대는 북방 유목 민족과 남쪽으로 밀려난 한족이 대립했던 시기다. 낙양에 수도를 둔 북위를 비롯해 북조 여러 나라에서는 유제품이 주 음료였다. 연회를 열 때는 우유나 양젖을 비롯한 낙농 음료를 마셨다.

북방의 지배자 시각에서는 남방으로 밀려난 한족이 마시는 차는 천박한 음료에 지나지 않았다. 북방 귀족의 연회에서는 차도 함께 준비했지만 어디까지나 북조에 항복한 남조의 장군과 귀족들이 유목민의 음료를 마시지 못하니까 이들을 위해 차린 음료였을 뿐이다. 항복한 패장들이었으니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고 그들이 마시는 차 역시 같은 취급을 당했다.

차가 우유의 몸종이 된 이유다. 게다가 당나라 이전에는 차가 널리 퍼지지도 못했다. 차나무는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식물로 예전 중국에서는 주로 사천, 구이저우, 윈난에서 재배했다. 한나라 말과 삼국시대만 해도 구이저우와 윈난은 제갈공명이 남만 정벌에 나섰던 남만의 오랑캐 땅이었고 사천은 먼 시골인 파촉 지방이었으니 공간적으로 또 기술적으로 찻잎이 널리 퍼질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이때만 해도 찻잎을 가루로 만들어 마시는 초기 형태의 말차(末茶)가 중심이었으니 지금처럼 맛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구박받던 차의 위상이 8세기 당나라 중기 이후부터는 180도 달라졌다. 차는 선비들이 마시는 품격 높은 음료가 됐고 귀족들이 즐기는 기호품이 됐다. 차의 역사에서부터 차의 종류, 마시는 법과 차 마시는 도구까지를 기록한 책도 나왔는데 경전으로 취급해 제목도 아예 『차경(茶經)』이다.

당나라 때 차가 급속하게 퍼진 배경으로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먼저 강남의 발전을 꼽는다. 남북조 시대 이래로 인구가 대거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양자강(長江)을 따라 차 재배 지역과 가까운 강남이 집중적으로 개발됐다. 강남 경제권 발달과도 맞물려 있지만 더불어 무인 중심의 북방 호족 문화가 쇠퇴하고 문인 중심의 남방 귀족 문화가 발전했다.

당 이전의 남북조 시대는 전쟁의 시대였다. 때문에 무인의 호방함과 용기가 대우받고 그 상징으로 음주문화가 만연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문인이 대접받는 세상이었다. 과거제도의 정착을 통해 사대부가 득세했고 불교가 번성했다. 이럴 때는 술보다 정신을 맑게 하는 차가 더 어울린다. 당나라 선비는 과거에 장원급제해 진사가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고 당나라 때 유행한 선종은 참선을 통해 자신을 깨쳐야 했기에 너도나도 차를 마시면서 다도가 유행했다.

그러다 보니 차 산업이 번성해 당 현종 때인 개원(713~741년) 연간에는 지금의 하남과 하북에서부터 수도인 섬서의 장안에 이르기까지 도시마다 곳곳에 찻집이 문을 열고 차를 끓여 팔았는데 너도나도 돈을 아끼지 않고 차를 사서 마신다고 했으니 요즘 우리나라 건물마다 카페가 한두 개씩 들어선 모습과 비슷한 모양새다. 중국 차 역사에 뜻밖의 사실들이 수두룩하다.

더차이나칼럼

더차이나칼럼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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