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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석만의 직격인터뷰

“방향 잃고 학력고사처럼 변질, 원조 수능으로 돌아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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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혼란의 수능, 해법은…김성열 경남대 명예교수 

윤석만 논설위원

윤석만 논설위원

수능 뒤엔 언제나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올해는 유독 그렇다. 지난 6월 윤석열 대통령의 ‘킬러 문항’ 발언으로 시작된 혼란은 수능 당일까지 계속됐다. 특히 이번 수능은 전 과목 만점자가 한 명에 불과할 만큼 ‘불수능’이어서 8일 성적표 공개 후 논란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매년 반복되는 혼란과 갈등의 원인은 무엇인지 올해 30주년을 맞은 수능의 개선책에 대해 김성열(67) 경남대 명예교수에게 물었다.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원장과 한국교육학회장을 지낸 그는 입시·평가 분야의 전문가다.

학교 수업 미비해 수능 변질

수능이 정말 문제인가.
“그렇다. 당초 의도를 벗어나 과거의 학력고사처럼 변질했다. 원래 수능은 미국의 수학능력평가(SAT)처럼 통합적 사고력을 측정하는 시험이고, 학력고사는 미국대입시험(ACT)처럼 특정 과목의 지식과 학력을 평가하는 시험인데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돼버렸다.”
사고력과 지식 평가 방법이 다른가.
“지리 과목을 예로 들면, 학력고사에선 교과서와 참고서의 지식을 얼마나 잘 습득했는지 측정한다. 그러나 원래 수능에선 기본 개념을 바탕으로 지리 현상을 분석하고 함의를 유추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본다. 어떤 조건에서 도시가 형성되고 발전하는지, 세계 각 도시의 차이는 무엇인지 탐구하는 식이다.”

통합 사고력 측정 목표로 했지만
당시 학교는 수능식 수업 어려워

점차 교과목 측정 시험으로 변질
급기야 변별 위한 킬러문항 등장

현재 학생 줄고 탐구식 수업 가능
수능 원래 취지 살릴 여건 갖춰져

김성열 경남대 명예교수(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지금의 수능은 많이 변질했지만, 국가 수준의 지필고사 중 원조 수능 만큼 퀄리티 높은 시험은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김성열 경남대 명예교수(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지금의 수능은 많이 변질했지만, 국가 수준의 지필고사 중 원조 수능 만큼 퀄리티 높은 시험은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왜 변질했나.
“초기 수능은 학력고사의 폐해를 잠재울 만큼 혁신적이었다. 언론에서도 높은 평가를 했다. 그러나 수능을 뒷받침할 만큼 학교 수업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 수능을 잘 보려면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통합하고, 스스로 탐구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하는데 학교가 따라오지 못한 것이다.”
교사들의 잘못인가.
“교육제도를 입안할 때는 먼저 사회에 적합한 인재상을 구상하고, 필요한 교육 내용이 무엇인지 정한 다음, 그에 맞는 학습법과 평가 시스템을 갖추는 게 순서다. 수능 이전까지 학교에선 젖먹이에게 지식을 떠넘겨주듯 하는 ‘암죽식’ 교육이 팽배했다. 그런 상황에서 입시제도만 덜렁 바꿔놨으니 현장에서 적응할 수 없었다.”

전국 수석 제주 대기고의 비법

1993년 수능 수리 탐구Ⅱ 42번 문항. [사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1993년 수능 수리 탐구Ⅱ 42번 문항. [사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2020년 한국사 20번 문항. [사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2020년 한국사 20번 문항. [사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1997년 수능에선 유수의 명문고를 제치고 대기고(제주)가 전국 수석을 깜짝 배출했다. 알고 보니 앞선 수능에서도 전국 5위(1994학년도), 3위(1995학년도)의 성적을 내며 명문고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비결은 학생 중심 수업이었다. 사회 시간에 교과서 대신 신문자료를 스크랩해 발표하고, 수학 시간에 다른 학생의 문제풀이 과정을 보며 토론하는 등 당시로선 혁신적 수업을 펼쳤다.

수능에 적합한 수업이란.
“탐구식 수업이다. 대기고처럼 학생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직접 해결하며 역량을 기르는 방식이다. 그러나 당시 학교에선 자기주도학습을 강조했더니 학생들에게 문제를 내고 ‘알아서 풀어보라’는 식의 수업을 하기도 했다. 학교가 준비돼 있지 않았고, 학생 수도 한 반에 50명씩이나 돼 탐구식 수업을 할 여건이 안 됐다.”
수능이 변질한 건 언제부터인가.
“대략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다. 암죽식 수업으론 수능 준비가 어렵다는 불안감이 커지자 사교육이 파고들었다. 학원식 문제풀이가 주목 받으며, 수능이 사교육비의 주범처럼 몰렸다. 학교에서도 수업 시간에 다른 과목의 수능 문제집을 푸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등 파행이 커졌다. 그러면서 수능 출제 기조가 바뀌었다.”
어떻게 달라졌나.
“교과목 중심 출제로 서서히 돌아갔다. 대다수 학교는 대기고처럼 할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공교육 정상화란 이름으로 개별 교과의 지식을 평가하는 방식이 힘을 얻었다. 출제진 입장에서도 통합적 사고력과 문제해결력을 측정하는 문항을 만드는 게 매우 까다로웠다. ‘더 이상 낼 문제가 없다’는 현실적 고충도 있었다.”

단편 지식 평가로 변질한 수능

1993년 첫 수능의 수리탐구Ⅱ 42번은 한국사·세계사 지식을 바탕으로 경제학의 원리를 묻는 문항이다. 얼핏 역사 문제 같지만, 국내 통화량이 늘면 물가가 상승하고 인플레이션이 생기면 수입량이 증가한다는 개념을 알고 있어야 문제를 풀 수 있다. 반면 2020년 한국사 20번은 3점짜리 고배점 문항인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추론 없이 단편적 지식만을 묻고 있다.

출제 방식이 바뀐 건가.
“언어, 수리탐구Ⅰ·Ⅱ, 외국어 등의 영역에서 통합적 사고력을 측정하던 수능이 2014학년도부터 국어·수학·영어 등 교과목 시험으로 바뀌었다. 개별 교과의 지식위주 평가가 강화됐고, 교과서 중심 출제, EBS 연계 등 방침과 함께 본격적인 ‘쉬운 수능’의 시대가 열렸다. 변별력 논란이 일면서 자연스레 ‘킬러 문항’도 등장했다.”
이쯤에 ‘자격고사화’ 주장도 있었다.
“1969~1980년 실행한 예비고사가 대표적인 자격고사다. 말 그대로 대입 자격만 평가하는 시험이라 지금처럼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적용하는 정도의 의미라면 자격고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수능이 입시의 주요 수단인 상황에서 자격고사화하자는 건 비현실적이다. 그렇게 하면 대학별 고사가 더욱 중요해진다.”
절대평가 논란도 있었다.
“단계적 절대평가 전환은 지난 정부의 공약이었다. 영어·한국사만 절대평가로 바꾼 상태에서 학생·학부모의 반발로 중단됐다. 학생의 성취수준을 평가하는 것과 선발을 위한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또 절대평가는 시험이 쉬울 거라 생각하는데 그건 착각이다. 이번 수능 영어처럼 성취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어려울 수 있다.”

정권에 따라 오락 가락이 문제

입시정책은 왜 자꾸 바뀌나.
“전형 요소는 크게 내신(학생부+교과), 수능, 대학별 고사(심층 면접+실기)다. 학교는 공교육 정상화를 내세우고, 대학은 자율성을 주장한다. 정부는 객관적인 평가 자료로 사교육을 감소시킬 수 있는 국가적 차원의 시험을 필요로 한다. 이들 세력의 목소리 크기에 따라 입시가 계속 바뀌었다. 결과는 학생만 혼란스러웠다.”
지난 정부에서 학종(학생부종합전형)이 큰 문제 아니었나.
“취지 자체는 옳지만 공정성 논란이 거셌다. 세계 올림피아드 대회 1등이 서울대에 떨어져서 MIT에 장학금 받고 진학한 사례도 보도됐다. 학생부에 교외 수상실적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스펙이 될 만한 대회를 잘 여는 학교가 있고 그렇지 못한 학교도 있다. 기록 내용을 제한하기보다 다양한 활동을 기재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고교학점제는 수능과 모순된다는 주장도 있다.
“학점제의 취지는 다양한 과목을 골라 듣는 건데, 수능 과목 위주로 파행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하지만 수능 과목만 공부한다는 편견을 깨야 한다. 컴퓨팅이 중요해지면서 정보과목 학습이 강화됐지만, 수능에 나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교육부가 예고한 대로 통합 출제를 하면 다양한 과목을 심화 학습한 학생이 유리할 것이다.”
입시를 어떻게 바꿔야 하나.
“대학입학처럼 중요한 시험에선 두 번째 기회(second chance)가 꼭 있어야 한다. 한때 서울대가 수시모집으로만 83%를 선발했는데, 어느 한 전형 요소가 3분의 2를 넘으면 안 된다. 개인적으로는 수능과 내신, 대학별 고사가 5:3:2 정도 되면 적합한 것 같다. 다만 지금 같은 방식의 수능은 안 된다.”
수능 개선 방향은.
“기본으로 돌아가라(Back to the Basics)다. 원조 수능은 국가 단위의 평가 방식 중 품질(퀄리티)이 가장 높았다. 요즘 학교는 탐구식 수업을 많이 하고 학생 수도 줄었다. 원래의 수능처럼 통합적 사고력 측정이 가능한 여건이 됐다. 다만 제도는 늘 현실 속에서 진화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꺼번에 바꾸려 하지 말고, 목표를 향해 직진하지 않고 꾸불꾸불하게 가야 한다. 정책의 취지를 국민에게 친절히 설명하고, 이해관계가 다른 교육 주체들을 설득해야 한다. 교육이 백년대계인 이유다.”

◆김성열 교수=한국교육학회·한국교육행정학회·한국교원교육학회·한국지방교육경영학회 등 복수의 학회장을 지낸 교육정책연구 분야의 권위자로 2016년 세계적 인명사전인 마르퀴즈 후즈후에 등재됐다.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경남대 부총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