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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부처길…그 옛날 선비처럼 유유자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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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진우석의 Wild Korea ⑨ 전남 영암 월출산

월출산 산성대 코스에서 바라본 천황봉. 산줄기가 공룡 등 같다.

월출산 산성대 코스에서 바라본 천황봉. 산줄기가 공룡 등 같다.

한 해를 마무리할 때다. 월출산(809m) 도갑사에서 홀로 머물며 2023년을 찬찬히 되돌아보기로 했다. 산사의 긴 긴 밤은 성찰하기 좋은 시간이다. 템플스테이 후에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월출산에 올랐다. 지난 9월 ‘하늘 아래 첫 부처길’이 개통했다는 소식이 반가웠다. 산에서 만나는 앙상한 나무와 형형한 바위는 무언가 깨달음을 줬다.

방안서 내다보는 월출산 줄기

도갑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탑돌이를 했다.

도갑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탑돌이를 했다.

오후 4시, 도갑사에 도착해 선불장(選佛場) 건물의 방 한 칸을 배정받았다. 방은 작지만 정갈했고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방문을 여니 대숲 넘어 월출산 줄기가 보였다. 신라 말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도갑사는 호남에서 손꼽히는 명찰이다. 건네받은 생활한복으로 갈아입고, 국보인 해탈문과 보물인 미륵전의 석조여래좌상, 도선국사비 등 도갑사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저녁 공양 후에 스님과 꽃차로 차담을 나누며 ‘내가 나를 지켜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성찰의 화두를 받았다.

도갑사 템플스테이 방은 아담하고 정갈하다.

도갑사 템플스테이 방은 아담하고 정갈하다.

산사의 어둠은 빠르다. 땅거미 내려앉는 고요한 산사를 누릴 수 있는 건 템플스테이의 특권이다. 대웅보전 앞 오층석탑을 탑돌이 하며 ‘나를 지켜주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방에 들어와 가부좌 틀고 화두를 붙잡았다. 열이 올라 방문 열고 별을 바라보다가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꿈속에서도 화두를 붙잡으려 했을까. 잠이 깨면서 ‘욕심을 부리지 말자. 계속 여행을 떠나자’라고 중얼거렸다. 이것이 나를 지켜주기를 바란다.

모든 바위가 부처로 보이는 마법

아침을 든든히 먹고, 공양주 보살이 주신 군고구마와 바나나를 야무지게 챙겼다. 도갑사에서 바로 올라가는 등산로 대신에 녹양마을에 있는 ‘하늘 아래 첫 부처길’을 선택했다. 월출산 유람하던 선비들이 다니던 옛길이다.

녹양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 바로 위에 대동제가 자리한다. 영암 군민의 식수원이다. 대동제 위로 콸콸 좔좔 쏟아져 내리는 계곡을 따른다. 날이 맑은 덕분에 산죽·참식나무·대나무 등이 반짝반짝 빛난다. 어젯밤 나름 수행을 해 그런지 겨울빛과 낙엽 밟는 소리, 물소리가 다 고맙다.

2시간에 걸친 인내 끝에 용암사지에 닿았다. 어쩌자고 이리 높은 곳에 절을 지었는지. 볕 잘 드는 용암사지 너른 공터에는 자연산 머위가 쑥쑥 자라고 있다. “머한다요. 빨리 따 집에 가져가 부러. 안사람에게 이쁨 받는당께.” 배 나온 영암 아저씨의 사투리가 정겹다.

국보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 크기가 8.6m에 달한다.

국보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 크기가 8.6m에 달한다.

용암사지 삼층석탑은 아우라가 강하다. 탑 아래 앉으면 저절로 수행이 될 것 같다. 용암사지에서 100m쯤 오르면 마애여래좌상을 만난다. 화강암을 우묵하게 파고 그 안에 불상을 새겨 넣었다. 크기가 무려 8.6m다. 마애여래좌상 덕분에 주변의 바위들이 전부 부처로 보인다. 월출산은 부처산이다.

삼층석탑에서 구정봉 가는 길은 눈이 호강한다. 왼쪽으로 천황봉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큼의 좁을 굴을 통과하면, 대망의 구정봉 정상에 선다. 시야가 거침없고 하늘이 넓게 열린다. 장쾌하고 통쾌하다.

설악산 뺨치는 산세

영암 고을이 내려다보이는 구정봉. 바위에 파인 물웅덩이가 9개 있다.

영암 고을이 내려다보이는 구정봉. 바위에 파인 물웅덩이가 9개 있다.

구정봉은 암반에 9개의 돌우물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바위에 크고 작은 홈이 파였고, 그 안에 물이 고여 있다. 문헌에 따르면 마르지 않은 돌우물에서 용 9마리가 살았다. 구정봉 근처에 있다는 괴이한 동석(動石)은 아침에는 향로봉 쪽에 있다가 저녁에는 구정봉 쪽으로 움직인다고 한다. 이를 영암(靈巖)이라 불렀고, 고을의 이름이 됐다.

구정봉까지 왔는데 천황봉을 안 갈 수 없다. 저 멀리서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천황봉에 서면 하늘에 오른 듯한 뿌듯한 감정이 밀려온다. 하지만 구정봉만큼 충만한 느낌은 아니다. 그래서 선인들이 월출산 최고봉을 구정봉이라고 했나 보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은 출렁다리, 바람재, 산성대 세 가지다. 주차장까지 3.3㎞로 다른 코스보다 1㎞쯤 길지만, 풍광이 좋은 산성대 코스를 선택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삼거리에서 산성대 코스로 접어들면, 아기자기한 암릉이 이어진다. 어려운 구간은 계단을 깔아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 산성대 코스 중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르면 입이 떡 벌어진다. 천황봉에서 내려온 산줄기 중 하나는 출렁다리가 있는 사자봉으로 가고, 또 하나는 산성대로 내려온다. 공룡의 등처럼 거칠고 수려한 산줄기가 설악산 안 부럽다. 봉수대가 있었던 산성대 터를 지나면 영암 시내를 바라보면서 내려온다. 마침내 지루한 길은 주차장에 닿으면서 끝난다. 먼 길이라 피곤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힘차다. 돌에는 힘이 있다. 월출산의 굳센 정기를 받았으니, 내년에도 힘차게 살아야겠다.

☞여행정보=템플스테이 홈페이지에 사찰의 특징과 가격 등 정보가 잘 나와 있다. 도갑사는 사람이 많지 않아 호젓하게 머물기 좋다. 월출산 트레킹은 녹양마을 주차장(회문리 산19-2)~용암사지~구정봉~천황봉~산성대~산성대 주차장 코스로, 거리는 약 10㎞고 시간은 6시간쯤 걸린다. 거리보다 시간이 꽤 걸린다. 대중교통으로 출발점인 녹양마을 주차장에 가려면 택시를 이용한다.

글·사진=진우석 여행작가 mtswam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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