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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저절로 팔 움직이는 민호…희귀병 잡는 '이건희 프로젝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5살 민호(가명)는 팔·다리가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희귀병을 앓는다. 경북대병원이 갖가지 검사를 했으나 병명을 찾지 못했다. 의료진은 민호·부모 혈액을 서울대병원으로 보내 ‘트리오 홀엑솜 검사’를 했다. 유전자를 통째로 검사해 이상 부위를 찾는 작업이다. 진단율이 최대 45%에 달하는 첨단 검사이다. 검사했더니 파킨슨병을 일으키는 유전자 변이가 확인됐다. 하지만 경북대병원 이윤정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주저했다. 민호의 증상과 일치하지 않았다.

 이 교수는 서울대병원 측에 SOS를 쳤다. 추가 검사로 이어졌다. 여기서 새로운 원인 유전자가 나왔다. 서울대병원의 환자 자료 풀(pool)에서 비슷한 사례를 확인했다. 이윤정 교수는 “결론을 내지 못하는 사례에 대해 이차적인 의견을 들어야 할 때가 있다”라며 “'이건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선생님들과 토의를 통해 결론을 내리고 치료 계획을 잡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유족이 2021년 5월 소아암·희귀병 극복에 써달라고 서울대병원에 3000억원을 기부하면서 시작됐다. 이 사업에는 전국 160곳 의료기관에서 1071명의 의료진과 전문가가 참여하는데, 이 교수도 일원이다. 민호는 기부금 덕분에 고가(500만~1000만원)의 신기술 유전체 분석 검사를 무료로 받았다. 이보다 더 값진 것은 집단지성 활용이다.

지난 8월 29일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 내 진단검사의학과 분자진단검사실에서 연구원이 '트리오 홀엑솜 검사'를 하면서 DNA 샘플의 농도를 측정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지난 8월 29일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 내 진단검사의학과 분자진단검사실에서 연구원이 '트리오 홀엑솜 검사'를 하면서 DNA 샘플의 농도를 측정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이건희 프로젝트가 병원 간, 영역 간 경계를 넘어 전문가가 원팀이 돼 희귀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네트워크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세계에서 환자가 5명도 안 되는 병이 있을 정도로 희귀하다 보니 독자적으로 진단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이 교수는 “여러 전문가가 하나의 팀으로 환자를 보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900명(부모까지 2600명)의 희귀병 환자가 트리오 홀엑솜 검사를 받았고, 나아가 네트워크 진료로 병명을 찾았거나 찾아가고 있다.

 진행 방식은 이렇다. 전국의 병원이 혈액 검체를 서울대병원으로 보내면 4~6개월 뒤 결과를 ‘레어디엑스(RareDx)’에 올린다. 임상 및 유전체 데이터 기반의 진단 웹이다. 마치 데이터 보물창고 같다. 여기를 통하면 종전보다 훨씬 병명을 찾기 쉬워졌다. 중앙본부 역할을 하는 서울대병원과 수시로 의견을 교환한다. 이 병원은 매달 10~15명의 관련 의사가 모여 환자 사례를 분석하고 어떤 검사를 추가할지를 정해 각 병원에 알려준다. 이런 과정에서 희귀병 지식이 전국으로 퍼진다.

지난 8월 29일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 내 진단검사의학과 분자진단검사실에서 연구원이 '트리오 홀엑솜 검사'를 하며 PCR과정을 거쳐 증폭된 DNA를 정제 후 추출하고 있다. 이 검사는 진단율이 최대 45%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김종호 기자

지난 8월 29일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 내 진단검사의학과 분자진단검사실에서 연구원이 '트리오 홀엑솜 검사'를 하며 PCR과정을 거쳐 증폭된 DNA를 정제 후 추출하고 있다. 이 검사는 진단율이 최대 45%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김종호 기자

 우혜원 충북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유전 변이가 발견됐다고 해서 ‘A유전자 변이=A질병’ 이라고 얘기하는 게 맞지 않을 수 있다. 세계에 수 십 명밖에 되지 않는 희귀질환인 경우 더 그렇다”라며 “타 병원 의료진과의 경험 공유 네트워크를 통해 보다 정확하고 신속하게 진단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김영옥 전남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환자가 어느 지역에 거주하든 공통된 진단법으로 빠르게 진단·치료받고, 적절한 관리체계의 지원을 받는 첫걸음”이라고 설명했다.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의료진들은 정기적으로 온라인 회의 를 열어 사례 탐구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채종희 서울대병원 희귀질환사업부장(소아청소년과 교수)은 “이번 사업이 '진단 방랑'을 줄이는 데 기여할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환자가 지역 거점 병원에서 같은 진단과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의료진의 역량을 강화하게 될 것”이라며 “함께 연구하고 경험을 나누다 보면 젊은 인재 양성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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