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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 먹고 추락했나…남원, 내년에 다시 한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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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이 나왔다. 클라이밍 하던 손들은 젓가락 들기에 바빴다. “기껏 (체중을) 줄여놨더니!”라면서도 사람들은 모락모락 김이 나는 면을 한 움큼 흡입했다.

2023년 스포츠클라이밍 시즌 마지막 대회인 남원시장기가 열린 11월 18일,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그런데도 250여 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김홍준 기자

2023년 스포츠클라이밍 시즌 마지막 대회인 남원시장기가 열린 11월 18일,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그런데도 250여 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김홍준 기자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출전해 보니

# 한파 속 250여 명 몰려
“추워도 해요, 눈 와도 해요.”
대회 총책임자인 이성윤 전북산악구조대장은 “걱정하지 말고 오시라”고 했다. 통화 이틀 뒤인 대회 날. 정말 추웠고, 정말 눈이 왔다. 남원시 수은주는 영하 5도까지 떨어졌고, 대설주의보가 발령됐다. 바람까지 불어 체감 영하 10도였다. 손이 곱았다. 홀드(hold·클라이밍 중 손이나 발로 제어할 수 있는 부분)를 잡다가 부러질까 싶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한단다. 무려 170명이 한파를 뚫고 왔다. 응원 나온 가족, 대회 관계자까지 합하면 250여 명이었다.

지난달 18일 전북 남원시 종합스포츠타운. 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대회가 열렸다. 주최 측에서는 어묵탕을 설설 끓이다가 돌연 자장면을 뽑기도 했다. 쏠쏠한 경품도 뽑았다. 동호인이 참가할 수 있는 올해 마지막 클라이밍대회에 출전했다.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조금은 다른, 그래서 날씨마저 녹일 정도로 뜨거웠던 하루를 전한다.

지난 2023년 11월 18일 남원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에서 초등학생(왼쪽)이 초등생을 위해 마련한 '보너스 홀드'를 이용해 등반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 2023년 11월 18일 남원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에서 초등학생(왼쪽)이 초등생을 위해 마련한 '보너스 홀드'를 이용해 등반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2023년 11월 18일 전북 남원시에서 열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를 앞두고 선수들이 실내에서 몸을 풀고 있다. 김홍준 기자

2023년 11월 18일 전북 남원시에서 열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를 앞두고 선수들이 실내에서 몸을 풀고 있다. 김홍준 기자

경기도 고양시에서 남원까지 오전 7시 30분 선수 등록 시각에 맞춰서 가려면 새벽기차를타야 했다. 용산역  오전 5시께 출발이었으니, 부지런히 발을 옮겨야 했다. 255㎞ 거리였다. 부산에서 온 박지수(15)군은 전날 어머니와 함께 남원 시내에서 숙식했단다. 일단 컨디션 조절에서 한 수 뒤졌다. 박지수군은 기자의 ‘경쟁자’였다. 50대 기자 아저씨와 10대 중학생의 대결?

남원 대회는 색다르다. 남녀노소를 안 가린다. 최연소 6세 홍세영양부터 최고령 60세 최진호씨까지, 한 그룹에 섞여서 겨룬다. 중장년부·학생부로 가르는 다른 대회와 달리 실력만 보겠다는 것이다. 시쳇말로 ‘계급장 떼고 맞장 뜨라’는 게다. 다른 대회와 더욱 차별화된 점은 스스로 자신이 뛸 그룹을 고르는 것. 자신의 기량을 가늠해 5.9, 5.10, 5.11, 5.12(암벽등반 난이도) 네 그룹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물론 순서대로 점점 코스가 어려워진다. 하지만 5.12에 나갈만한 선수가 5.11이나 5.10에 나간다면? 입시 용어처럼 ‘하향지원’이 된다. 그렇다고 쉽지는 않다. 역시 입시처럼 ‘눈치작전’의 쓴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중간한 5.10 그룹에는 이날 무려 54명이 출전했다. 대부분 하향지원이었다. 남원 대회는 누가 더 많이, 더 빨리 가느냐로 순위를 가린다. 김자인(34) 선수가 30승을 올린 리드 부문이다. 때문에 ‘만점(끝까지 가는 완등)’을 받아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와!” 대회 시작을 알리는 함성이 아니었다. 오전 9시 등록을 마친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본부석 뒤 장막을 젖히고 나온 그들의 손에는 어묵탕이 들어 있었다. 따끈한 국물이 목구멍을 넘어 식도를 적시자 나온 자연발생적 탄성이 “와!”였다. 푹푹 넣은 가쓰오부시와 멸치를 느른해지도록 우리고, 다시마와 무를 노곤해지도록 끓인 맛은 아니지만, 수은주가 뚝 떨어진 영하의 아침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것이다.

2023년 스포츠클라이밍 시즌 마지막 대회인 남원시장기가 열린 11월 18일, 추위를 피하기 위해 텐트들이 들어섰다. 김홍준 기자

2023년 스포츠클라이밍 시즌 마지막 대회인 남원시장기가 열린 11월 18일, 추위를 피하기 위해 텐트들이 들어섰다. 김홍준 기자

“와!” 1차 예선. 완등의 환호성이었다. 2차 예선과 결승이 남았다. 어묵탕도 1차를 넘어 2차로 나왔다. 이것도 시험이라고 생각인가 싶었다. 참았다.

5.9그룹 루트에서 한 ‘성인’이 키 작은 초등학생만 사용하도록 마련한  ‘보너스 홀드’를 움켜잡았다. 즉각 본부석의 경고가 날아들었다. “×××번 선수, 그거 잡으시면 안 돼요. 초등학생용입니다.” 그러자 ×××번 선수의 대답. “저 초등학생이에요. 헉, 헉. 힘든데 왜 그러세요. 헉, 헉.” 대회장은 순간 웃음바다가 됐다. 2021년 기준 초등학생 6학년의 평균 키는 153cm다. 그보다 20cm 가까이 큰 초등학생 선수가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1톤 트럭이 나타났다. ‘요원’들이 속속 내리더니 밀가루 반죽을 치댔다. 적당히 두들겨 맞은 반죽은 우직하게도 생긴 제면기에서 섬섬옥수처럼 가녀리면서도 육체파 배우처럼 탱글탱글하게 빠져나왔다.

 지난 2023년 11월 18일 남원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에서 자장면을 만들고 있는 남원시사회복지협의 관계자들. 김홍준 기자

지난 2023년 11월 18일 남원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에서 자장면을 만들고 있는 남원시사회복지협의 관계자들. 김홍준 기자

지난 2023년 11월 18일 남원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에 등장한 자장면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김인수(왼쪽)씨와 전효성씨. 김홍준 기자

지난 2023년 11월 18일 남원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에 등장한 자장면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김인수(왼쪽)씨와 전효성씨. 김홍준 기자

“봉사하는 겁니다. 재료값만 받고요. 자장면 맛보시고, 내년에도 또 오시라고요.”
제면기에 반죽을 넣던 최인술(60)씨의 말이다. 최씨를 비롯한 남원시사회복지협의회 회원들은 기술을 배워 지역에서 ‘사랑의 짜장 봉사’를 해왔는데, 이날도 출동을 한 것. 경북 구미에서 온 전효성(38)·김인수(25)씨는 “여기저기 대회 다녀 봤지만, 자장면은 처음인데”라며 그릇을 비웠다. 그동안 먹고 마시기를 주저하며(사양하지는 않았다) 체중 2㎏을 줄였지만, 기자는 그 자장면에 앞에서 주저앉았다. 누군가 말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큰일 나는데, (배불러서) 탈락인데”라고.

대회 관계자와 선수 가족까지 포함해 200여 명이 자장면을 비웠다. 그러자 남원시산악연맹 관계자들은 쉬는 시간을 이용해 일사불란하게 설거지를 했다. 대회 운영 방침만큼이나 퍽 드문 광경이었다.

5.10그룹 출전자 54명 중 1차 예선 만점자(완등자)가 무려 29명이었다. 예선의 경우 한 자릿수로 완등자가 나와야 하는데, ‘변별력’이 떨어진 것이다. 인공암벽에 ‘문제’를 내는 루트 세터(route setter)들이 수험생인 선수들의 기량을 가늠해 내지 못하거나 남원 대회의 특성상, 하향지원이 두드러진 탓이다.

우리나라에 스포츠 클라이밍이 들어온 지 30여 년. 한 세대가 흐르면서 사람도, 장비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5.10은 스포츠클라이밍 세계적으로 본격화한 80년대 후반에는 ‘감히’ 오를 수 없는 암벽 등반 그룹이었다. 선망의 그레이드라서, ‘5.10’이라는 아웃도어 브랜드도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칼 루이스(미국)가 세운 육상 100m 세계신기록 9초92을 우사인 볼트(자메이카)는 9초58(2009년 세계육상선수권)로 당긴 것처럼, 스포츠클라이밍도 기록을 높였다. ‘로망’으로 불리던 5.10을 돌파해 5.11, 5.12, 5.13, 5.14, 5.15(5.10부터는 a,b,c,d로 다시 등급 세분화)로 쭉쭉 올라갔다. 현재 5.15급을 등반한 사람은 한국의 손상원(42)을 포함, 전 세계에서 120명 안팎이다. 5.15등급은 여러 유형의 루트가 있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천장(天障)을 이룬 바위에서 손가락 반 마디 정도, 발가락 반 마디 정도 끼고 오를 수 있는 극심한 곳이다. 인간이 오른 최고 난도는 5.15c. 2022년 기준 아담 온드라(30·체코)를 비롯해 7명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 미지의 5.15d, 5.16을 등반하고 있을 것이다.

숫자로 보는 5.15 등반 난도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99boulders]

숫자로 보는 5.15 등반 난도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99boulders]

우리나라 클라이밍 인구도 2030세대를 중심으로 급증했다. 이들은 전국 600여 개에 이르는 실내암장에서 ‘1주 3클’을 하다가 차츰 자연바위로 나오고 있다. 실내암장이든, 자연바위이든, 혹은 함께하든, 클라이밍 인구는 45만 명으로 추산(대한산악연맹)된다. 그중 한 명인 전주에서 왔다는 선수의 어머니가 말했다. “5.10그룹에 5.13급을 한 사람들이 몇 명 있다는데요?”

# 2차 예선에서 쓰디쓴 추락
“그래서, 2차 예선은 예정된 루트를 수정해 난도를 조금 높였습니다.”
대회 관계자는 즉석에서 루트를 바꿨다고 밝혔다. 수정이라고 해봤자, 디딤 방향을 위에서 아래로 뒤집고, 잡이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렸을 뿐이었다.

오후 2시. 5.10그룹 54명 중 52번째로 2차 예선전에 나섰다. ‘그래 봤자’ 정도로 루트를 수정했지만, 결과는 컸다. 1차 예선 완등자 29명 중 14명이 나가떨어졌다. 기자는 죽을힘을 다했다. ‘남원까지 왔는데… 일산에서 남원까지 왔는데…’라고 되뇌며. 고무신 같은 암벽화가 처음 디딘 곳은 미덥지 못했다. 오버 그립(over grip·필요 이상으로 힘을 씀)을 했다. 본능적인, 최초의 내 판단을 불신했다. 생각을 뒤집었다. 동작을 바꿨다. ‘아, 아닌데!’. 하지만 돌아가기에는 늦었다. 손이 미끄러졌다. 맹렬한 추락. 로프는 자장면처럼 길게 뽑혔다.
“수고하셨습니다.” 대회 안전요원의 인사말. 그렇게 끝났다. "하하하." 웃음으로 대답했다.

남원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한 그룹에서 경쟁한다. 지난 2023년 11월 18일 한 초등학생이 혼신을 다해 홀드를 잡으려 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남원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한 그룹에서 경쟁한다. 지난 2023년 11월 18일 한 초등학생이 혼신을 다해 홀드를 잡으려 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각 그룹 1~3위 수상자는 대부분 10~30대였다. 5.9그룹 1~3위는 모두 여성이었는데, 그중 3위 수상자는 모든 그룹 중 유일한 장년(50대)였다.

남원에 어둠이 내렸다. 선수 170명은 겨우내 담금질을 하고 내년 시즌을 기약할 것이다. 기자도 그중 한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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